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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 어느 혁명가의 일기

늙은어린왕자 2007. 2. 27. 09:25

내 인생의 한 권의 책

아름다운 집 - 어느 혁명가의 일기

손석춘 지음, 들녘 펴냄

 

 

얼마 전 한 선생님 집을 들렀을 때 추천받은 책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한겨레신문사에 근무하는 손석춘이라는 논객이 정리한 이 책은 '이진선'이라는 남로당 출신의 한 사회주의자의 일기다.

이 책에는 1938년부터 스스로 생을 마감한 1998년까지 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낡은 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한 착각 속에 펼쳐진다.

나는 그의 삶과 더불어 그의 삶을 잉태하게 한 사회의 변화과정에 더 관심이 갔다. 일제시대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에 들어가면서부터 그의 삶을 규정짓는 우리 조국의 현실들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근현대사를 훤히 밝혀주는 듯했다.

일제시대 민족지라고 자처하던 조선, 동아일보의 친일 추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해방 직후 남쪽에서 미국이라는 외세에 빌붙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는 친일파들의 행보가 또렷해지고, 북쪽에선 김일성이라는 권력자가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남로당 출신 동지들을 숙청했던 권력야욕도 베일을 벗고 다가온다.

월북했던 그는 박헌영이라는 위인이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하는 와중에서도 소련 유학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지만 60년대 이르러 북쪽의 권력이 관료화되기 시작하면서 북조선공화국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를 실천하는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북쪽의 사회주의는 결국 김일성을 영웅화, 신격화시키는 반사회주의적인 길을 걸으면서 사람과 인민을 배척하지만 이진선은 죽을 때까지 그 모순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고 그의 생각을 일기에만 숨겨 놓는다.

그가 남부군의 최고지도자 이현상에게서 받은 '혁명의 순결한 피'가 묻은 권총으로 자살하기까지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하여 인민들과 함께 '아름다운 집'에서 살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의 삶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그 스스로는 실패했다고 했지만...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이 성공하였고, 그 삶의 궤적들은 앞으로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또렷한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일기에는 그가 했던 사랑이 풋풋한 향기를 풍기며 가슴 저리게 한다. 대학시절 함께 혁명을 꿈꾸며 연애하여 만난 아리따운 여인 '신여린'과 그 사이에 태어난 세 살배기 아들 '이서돌'을 미군의 폭격에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어 외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최진이'라는 여인이 다가온다.

최여인은 김일성 항일부대의 전사였던 사람과 결혼한 '혁명부부'였으나 역시 반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북쪽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이진선과 통했다. 그의 남편은 한국전쟁 때 '남성'을 잃은 불구자였다. 같은 사상 때문인지, 남편의 불구가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진선과 최진이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대동강변에서 나눈 진한 사랑이 결국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아이가 태어난 직후 권좌에서 쫓겨난 최진이의 남편은 원인모를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진선은 최진이에게서 난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

이진선은 그의 일기를 최진이한테 넘겨주고 권총자살을 한다. 최진이는 그의 일기를 연변에 살고 있는 옛 동지에게 넘겨주고, 그 옛 동지가 남쪽의 신문들을 면밀히 살펴본 뒤 한겨레신문의 논객에게 건네줌으로서 세상에 이진선이라는 혁명가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삶과 더불어 근 현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훤하게 밝혀주고 있다. 남쪽의 권력과 북쪽 권력의 치부가 동시에 드러난 이 책은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횃불처럼 밝혀준다.

이 책을 읽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이렇게 역사에 강렬히 빨려 들어간 적이 있었던가. 대학 시절에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섬사람들’, 지리산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남부군’, ……. 어떻게 보면 나는 근, 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에 유난히 깊이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나와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울러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만한 손석춘의 다른 소설 ‘마흔 아홉 통의 편지’도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