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책을읽고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늙은어린왕자 2007. 2. 27. 09:28
이방인의 눈을 빌려 읽은 한국의 모습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



  사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은 저자가 신문에 연재할 때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시간이 날 때나 읽고 싶은 내용이라고 판단될 때 읽어서인지 대충 이야기의 분위기는 짐작하면서도 전체 책의 내용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마침 두 권 가운데 첫 번째 책을 선물 받고 읽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도서관에서 빌린 두 번째 책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읽고 싶은 곳만 골라 읽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박노자 교수가 신문에 글을 연재할 때 읽어보고 느낀 것이지만 그의 글에는 한자를 배우고 자란 나조차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다는 것이 읽는데 다소 걸림돌이 되었다. 어떨 때는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그의 글을 각색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도 했다. 또 그의 글은 너무 형이상학적이라고 할까.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일상의 모습을 솔직담백하게 그려주었더라면 그의 주장이 훨씬 더 부드럽게 우리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겠다고 생각했다.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글이 아니고 머리에서 다듬어진 생각이 많다 보니 읽기에 지루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좋아하는 까닭은 우리 역사와 사회에 관한 그의 식견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읽었던 사회과학 책 가운데 ‘당신들의 대한민국’ 보다 더 한국사회를 파고든 책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싶다. 더구나 그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우리 사회를 무 자르듯 갈라  놓고 이리 저리 분석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내가 우리 사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나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의 고전 자료까지 인용하며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줄타기하며 이야기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섬뜩하게 풍부하고 예리하다.

  한국인인 나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의 자화상들을 그는 명쾌한 시선으로 밝혀준다. 학교마다 서 있는 이승복 동상에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이순신 동상에는 무감했던 내게 그 동상이 ‘중세의 갑옷을 입은 군국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그의 분석은 새로웠다. 또 정치인이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만 탓하던 내게 나아가 군대란 국가의 제도화된 폭력에 다른 아니라는 이해를 안겨주었고, 의식은 진보지만 행동은 전근대적 속성을 그대로 지닌 한국사회 운동권의 모습에 대한 분석도 신선했다. 특히 고구려, 발해, 고려가 다인종, 다문화를 수용한 사회였다는, 그래서 국제 감각을 잃지 않고 뻗어나갈 수 있었다는 지적은 역사 시간에 단군을 중심에 놓은 단일 민족관에 무게를 두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내 역사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깨닫게 하였다.

 기존에 내가 가졌던 생각 가운데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우상숭배’는 북한의 것만이 아니라 남한에도 똑같이 존재한다는 분석, 어느 새 나도 혈연, 지연, 학연의 패거리 문화에 젖어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 한국사회의 패거리문화에 대한 지적,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우리말과 민족주의 의식에 대한 그의 통찰은 다시금 느슨해지는 내 의식의 밑바닥을 긁어주었다.

  책을 훑어보고 나니 얼마 전 황우석 논란 때 불거졌던 ‘애국주의’ 광풍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가 잘못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에게 다시 연구할 기회를 주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솔직히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박노자의 글을 읽고 나니 그 배경이 어슴프레 짐작이 되었다. 솔직히 나 역시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젖어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다른 나라 사람 몇 명 희생되거나 도덕률이 적당히 무시되어도 넘어갈 수 있지 않나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스스로는 진보의 편에 서 있다고 자위하면서도 말이다.

  그의 주장에 막연하게 동의하기가 꺼려지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그의 주장들은 서구에서도 앞서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들여다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막연한 짐작일 뿐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아무래도 둘째 권을 보고 난 뒤 판단하는 게 좋겠다. (2006.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