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 들려주기
무서운 이야기 들려주기
"선생님,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구름이라도 끼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조르기가 시작된다.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다.
자기들끼리 교실의 불을 끄기도 한다. 그러다 빗방울이 들고 진짜 비가 내리면 난리가 난다. 주먹을 쥐고 책상을 두드리며 "이야기! 이야기!" 하며 시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비가 오면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할게."
지난 3월, 비 내리는 날 오후에 지루해하는 아이들을 달래보고자 덜컥 약속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러나 3, 4월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는 "그래애-, 이야기를 듣고 싶단 말이지?" 하며 미리 준비해 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할 때는 우선 교실의 불을 모두 끄고 버티칼을 펴서 껌껌하게 만든다. 프로젝션 TV 화면에는 인터넷에서 받아둔 공동묘지 사진이나 귀신 얼굴을 띄운다. 그러면 아이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겠다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견줄 데 없이 진지하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내 입만 바라본다.
평소 공부 시간에는 느끼지 못하는 진지함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나도 분위기를 잡는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얼굴 근육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를 한다.
"지금부터 12년 전의 일이야. 생각만 해도 무서워.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 나무로 만든 아주 오래된 건물이 있었는데 글쎄 비가 오는 날이면 밤 12시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
12년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학교 때 이사 갔던 외딴 집에서 우리 가족이 겪었던 무서운 경험, 귀신에게 홀려 연못가에서 하룻밤을 지낸 동네 아저씨 이야기, 애장터에서 흘러나오는 아기들의 슬픈 울음소리, ….
주로 내가 겪었거나 가까이서 본 이야기들로 지난 두 달여 동안 이야기를 성공리에 마쳤다.
하지만 5월이 되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 앞에 선 내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사라지고 입에서는 핑계가 흘러나왔다.
“아침에는 비가 제법 오더니 오후가 되니까 햇살이 비치네. 아쉬워라.”
이렇게 된 까닭은 이야기 소재가 많지 않아서이다. 게다가 5월이 되니 비가 참 자주 내리는 것 같다. 3,4월에는 가뭄이 들만큼 비가 오지 않더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여름이 가까이 올수록 비가 자주 내린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선생님이 해 주시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다. 장마철이 되면 날마다 이야기를 해주시겠지? 히히.’
어느 아이의 일기장을 보다가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렇다고 아이들 앞에서 한 약속을 스스로 깨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야기 할 거리가 별로 없다고 변명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다.
이렇게 이야기 들려주기로 고민을 하다 보니 새삼 중학교 때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던 예쁜 미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참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주로 미술 활동을 하기 전이나 마친 뒤 5분이나 10분 정도씩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떼를 써서 미술 시간을 송두리째 잡아먹고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때 우리는 미술 활동도 재미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려고 미술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선생님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달콤한 꿀맛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어 내가 교사가 되고 보니 그 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싶다. 아마 그 선생님에게 이야기는 ‘꿀맛’ 보다는 ‘쓴맛’에 가까웠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듣기를 참 좋아한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TV나 비디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어도 아이들은 사람의 따뜻한 숨소리가 배어 있는 이야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내일이라도 비가 오면 아이들은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를 것이다. 이제 몇 가지 밖에 안남은 밑천을 잘 다듬어서 맛있고 달콤한 이야기로 엮어내야겟다.
그나저나 장마철엔 정말 어떻게 하지? (2004. 0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