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남의 허물을 탓하려면...

늙은어린왕자 2007. 2. 27. 11:01

 

남의 허물을 탓하려면

 

  운동회 하는 날이었다.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 나왔다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볼 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교장선생님의 호통소리가 현관을 울렸다.

  "여기가 신 신는데요? 어디서 신을 신고 들락날락거리는거요."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시다가 현관에서 신을 신고 왔다 갔다 하는 학부모들을 본 모양이었다. 순간 뜨끔했다. 나도 신을 신은 채로 현관을 통해 화장실로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관에서 행정실 앞 화장실까지는 불과 7~8m 밖에 되지 않는다. 평소에는 신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온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무로 된 실내화 통이 있어서 언제든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관에 들어설 때 어쩔까 잠시 생각을 했지만 그냥 운동화를 신은 채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오늘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서다. 그 짧은 생각이 문제가 된 것이다.

  잠시만 있으면 교장선생님이 교장실로 들어가겠지 생각하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서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겠다 싶어서 나갔다. 어쩌랴. 교장선생님은 이제서야 신을 벗고 들어오고 있는게 아닌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교장선생님의 시선은 바로 내 운동화로 꽂혔다. 순간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교사를 야단치기가 좀 그렇다고 여긴 것일까. 나는 멀쑥하게 눈 인사만 하고 얼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학부모들이나 어린이들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1시부터는 4~6학년의 운동회가 열리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1시가 되자 느닷없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후 운동회를 1시 30분으로 늦춥니다. 선생님들은 아동들을 스탠드에 앉혀서 질서있게 기다리세요."

왜 시간을 늦춘다는 것일까. 아이들은 모두 질서 있게 스탠드에 앉아서 시작 음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부모들도 점심을 먹고 삼삼오오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들 입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1시에 하려고 계획했으면 해야지 시간을 늦추는 까닭이 뭐냐는 것이었다. 

  체육담당 선생님한테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교장선생님 점심시간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체육진흥회 학부모들과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가 아직 식사시간이라고 늦추는 것이 이유가 됩니까. 빨리 하자고 하세요. 아니, 그냥 시작하세요."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따졌다.

  "내가 힘이 있나. 그리 하자고 하는데..."

  당장이라도 교장실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오늘 행사가 교장선생님을 위한 운동회입니까?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주인 아닙니까? 그걸 알면 행사 일정에 점심시간을 맞춰야지 교장선생님 점심시간 일정에 운동회 시간을 맞추면 어떻게 합니까?"

  입에서는 벌써부터 해야 할 말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교장실로 찾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몇 가지 가로막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만약 그렇게 따지면 앞으로 뻣뻣한 관계는 기본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건 충분히 참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금 전 현관에서 있었던 일을 문제삼을 것 같았다. 이 문제라면 달리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시간은 흘러가서 15분이 지나갔다. 그 때 체육담당선생님이 방송으로 운동회 시작을 알렸다. 조회대 위에는 교장선생님과 몇몇 양복 입은 학부모들이 어느 새 앉아있었다. 30분을 늦춘다고 했는데 꽤나 빨리 시작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을 탓하려면 먼저 내 허물을 둘러보는게 도리다. 내가 가진 허물이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니다. 작은 허물이든 큰 허물이든 본질은 같다. 어쩌면 내 허물은 늘 작아보이고 남의 허물은 크게만 보이는 것이 간사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현관에서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꼭 교장실로 찾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남는다. 체육담당 선생님은 커피를 마신다고 했지만 다른 까닭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불만이 있을 때마다 교장실로 찾아간다면 또한 올바르지 못한 처신일수도 있다. 정말 상대방의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면 내 마음을 먼저 안정시킨 뒤에 정식으로 면담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은 사려깊은 행동에 관하여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200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