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엽서
사라지는 엽서
예전엔 아이들과 편지나 엽서를 참 많이 주고받았다. 편지나 엽서는 손으로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써야 하니까 정성이 들어가게 되고, 쓰는 사람의 온기가 그대로 전달된다.
답장을 기다리는 것도 참 멋이 있었다. 답장은 언제나 뜸을 들였다가 오기 마련이다. 조급함을 못 이겨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답장을 받는 순간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이 지루함을 잊게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새 우리들 사이에는 종이와 연필 대신 컴퓨터의 번쩍이는 화면이 소통 도구가 되었다. 메일은 기본이고 메신저, 미니홈피를 모르면 아이들과 소통하기 어려워졌다. 아이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도 사라졌다.
이런 디지털 방식은 예전처럼 편지지와 봉투를 사는 번거로움도 없고, 눈 깜짝할 새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서 참 빠르고 편리하다.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 까닭이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이런 디지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편리함과 빠름에 이끌려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소리가 거슬려서, 요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다는 핑계로 종이와 연필을 멀리했다. 오륙년 전에는 사이버 세상에서 아이들을 만나니까 참 좋다며 여러 사람이 보는 잡지에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것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만난답시고 컴퓨터를 켜야 하고, 로그인을 해야 하고, 웅웅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딱딱한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가 싫어졌다. 게다가 메일함을 열어보면 쏟아지는 스팸메일, 광고메일들! 글을 주고받기 위해 그런 쓰레기들까지 관리해야 하는 ‘빠르고 편리한’환경과 거리를 두고 싶어졌다.
컴퓨터를 통해 주고받는 내용들은 따지고 보면 교실에서 잠깐만 짬을 내어 나누어도 될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정작 교실에서는 서로 얼굴을 맞대면서도 멀뚱멀뚱 남 보듯 하다가 컴퓨터 속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아이들에게 다시 종이와 연필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런 생각 때문이다.
바쁜 삶 속에서 눅눅히 편지지를 쓰다듬을 마음의 여유가 아직은 없어서 우선 엽서를 쓰기로 했다. 엽서는 크기가 작아서 쓰고 싶을 때 언제든지 메모지 쓰듯 꺼내어 쓸 수 있고, 편지처럼 사람 냄새도 담을 수 있다.
엽서는 교실에서 쓰기에도 아주 좋다. 바로 바로 내 생각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엽서들을 쌓아두었다가 언제든지 마술처럼 꺼내어 쓸 수 있다. 쓰는 시간도 한 장에 3분 정도면 되니 아날로그 방식이지만 디지털보다 더 디지털스런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난 김에 당장 써볼까 싶어서 아파트 상가 문구점에 갔더니 엽서가 없어서 홈플러스로 향했다. 부푼 꿈을 안고서 달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엽서가 없는 게 아닌가. 점원한테 물었더니 자신도 엽서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점원이 가리켜 주는 곳엔 비싼 캐릭터 편지지뿐이었다.
김해에서 제법 크다는 문구도매점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엽서는 갖다 놓지 않는다고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엽서쯤이야 당연히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우체국에 갔더니 거기는 우표를 새긴 엽서 밖에 없었다. 교실에서 손에서 손으로 전해줄 엽서인데 우표가 붙은 엽서라서 그냥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직원 중 한사람이 문구점에 가면 많이 있을 거라고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투덜거리며 집에 왔더니 아내가 그런다. 요즘 엽서 구하기 힘들다고. 자기도 교실에서 아이들한테 엽서를 써주는데 문구점에 가도 엽서가 없다고 한다. 문구점 아저씨조차 엽서를 구하기 힘들어서 부산에 있는 큰 도매상에 부탁하여 갖다 주었다고 한다.
다행히 이튿날 팬시점에서 엽서를 조금 살 수 있었다. 또 내 이야기를 들은 한 선생님이 전교조에서 지난달에 엽서를 많이 찍어냈다며 지회 사무실에 남아 있던 엽서를 제법 많이 가져왔다.
엽서 구하기를 하면서 새삼 사회 변화에 놀랐다. 세상이 변하면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옛것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사회도 하나의 생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편리함과 빠름에 이끌려서 '사람다움'의 가치도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자는 거창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건 그것대로 편리하게 쓸 때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교실에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편지나 엽서를 활용해보자는 게 내 생각이다.
책상 한 쪽에 그득히 쌓여 있는 엽서를 보니 마음까지 든든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바로 저 엽서에 따스한 마음을 적어서 아이들한테 전하는 일이다. 엽서를 보내는 일이 아이들에게나 나에게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올 것만 같다.
*지난 6월에 썼던 글을 조금 손질해봤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한테 보낸 엽서가 제법 됩니다. 내용은 칭찬이 많았고, 안 좋은 행동에 대하여 의견을 쓴 것도 있었지요. 엽서를 받은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한데 물어보지 않아서 밝히지는 못하겠네요. 다만 몇몇 아이가 받은 엽서를 책 속에 끼워두는 걸 본 적은 있습니다. 아쉬운 건 아직 답장을 하나도 못 받았다는 건데, 아마 그 아이들도 엽서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답장을 주든 안주든 앞으로 학급운영을 하면서 엽서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2007.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