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에어컨 켜기 작전(고치기전)

늙은어린왕자 2008. 9. 3. 17:30

에어컨 켜기 작전(고치기 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다. 가을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운동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온 몸이 땀에 젖는다. 교실에 들어와서 창문을 열어놓고 조금만 참고 있으면 시원할 법도 하지만 유달리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에어컨 버튼부터 누른다. 물론 아이들이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켜 주는 모양새를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아이들을 고마워한다.

  지난 7월에 있었던 일이다. 장마 끝 무렵, 아직 방학은 몇 일 남았고 교실은 무더웠다. 찌는 듯한 온도와 습도, 아이들 수십 명의 몸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교실에 가득했다. 문을 열어도, 천장에 달린 네 대의 선풍기를 틀어도 등 뒤로 땀이 촉촉하게 배고 있었다. 일 년 중에서 이맘 때가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시기다.

  방학을 2주일 앞둔 어느 날, 드디어 학교에서 에어컨을 켜준다고 발표를 했다. 그런데 켜는 시각이 문제였다. 요즘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다 보니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학년별로 시간대를 정해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학년은 1-3교시, 고학년은 4-6교시에 켜는 것이다. 우리 6학년은 11시 10분부터 1시 10분까지 두 시간이다. 6교시가 있는 날은 2시부터 40분간 더 켤 수 있도록 했다. 단, 최저희망온도는 교실에서 조절할 수 없고, 학교에서 24도로 정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에너지 문제가 워낙 심각해서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칠판에 '에어컨 켜는 시각 : 11시 10분'이라고 적어두고 내가 없더라도 시간이 되면 켜라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렇게 몇 일 동안 잘 지냈다. 확실히 에어컨은 돈 값을 했다. 선풍기 네 대만 돌릴 때는 더운 바람이 돌고 돌기만 해서 덥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에어컨을 켜니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하지만 11시 10분 이전이 문제였다. 두 시간 반을 찜통 속에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그럭저럭 잘 참는 것 같았는데 더위를 못 참는 내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전담실로 수업하러 가고 나면 혼자 있으면서도 몰래 켜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을 때 일찍 켜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의 눈 때문이다. 어느 날 10시 50분 쯤 되었을 때 "와이리 덥노" 하면서 에어컨을 켰더니 몇몇은 좋아라 했지만 늘 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아이들은 눈망울을 말똥말똥하게 반짝이며 이런다.

  "선생님, 아직 켤 시간이 아닌데 왜 켜요?"

  핵심을 콕 찌르는 말 앞에서 어찌나 부끄럽던지.

  방학을 몇 일 앞두고 날씨는 점점 더 더워졌다. 실내온도가 무려 34~35도를 오르내렸다. 아무래도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2교시가 끝나는 10시 40분에는 에어컨을 켜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눈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매서운 눈빛들을 요리할 수 있을까.

  수업이 끝날무렵 아이들이 내가 지시한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을 때 은근슬쩍 에어컨 가동 버튼을 눌러놓고 바람문이 열리는 동안 교실 가운데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시치미를 뚝 떼고 아이들이 문제 푸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어, 선생님. 에어컨이 켜졌어요."

  이 때를 놓칠세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받아쳤다.

  "어, 그러네? 오늘 너무 덥다고 학교에서 다 켜 주나봐."

  그러니 한 녀석이 적절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야, 오늘 학교에서 한 턱 쓰네요."

  아이들은 별 의심 없이 30분 일찍 켜진 에어컨을 받아들였다. 어설픈 내 작전에 말려든 꼴이라고 할까. 덕분에 우리는 그 날 조금 더 시원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시원했던 반면 아이들 눈치 보느라 속마음은 더 더웠다. (2008년 9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