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10월 22일 - 정훈이 웃겨!

늙은어린왕자 2010. 10. 22. 23:58

10월 22일 금요일 하늘이 푸른 날

정훈이 웃겨!


  오늘은 내가 맡은 교실 수업이 딱 한 시간 있었다. 첫째 시간은 <쓰기>인데 영어선생님이 <영어>를 보충했고 둘째 시간과 셋째 시간은 <과학>, <음악> 전담 시간이었다. 넷째 시간은 <합동 체육>이라 운동장에서 수업하다 보니 마지막 시간만 교실에서 했다. 이런 날은 교실이야기 주제 잡기가 힘들다.


  체육을 마치고 들어오니 정훈이가 동전 몇 개를 손에 들고 나한테 왔다.

  “선생님, 체육 하기 전에는 오백 원짜리가 세 개였는데 두 개 밖에 없어요.”

  “어디 뒀는데?”

  “사물함에요.”

  “그럼 다시 잘 찾아봐라.”

  “근데요, 체육 시간에 우리 반에 경희만 있었거든요. 경희한테 물어보세요.”

  경희는 교통사고로 다친 팔 때문에 요즘 운동장에 나가지 않는다. 녀석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경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희가 기분 나쁘다는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남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 돼. 돈 놔둔 곳을 잘 찾아봐.”

  “찾아봤는데요.”

  “없으면 잃어버린 거야.”

  퉁명스럽게 나무라며 녀석을 보내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미경이와 여학생 몇 명이 오더니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쇼파에서 주웠어요.”

  정훈이가 잃어버린 돈 같았다. 돈을 받아 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정훈이한테 안 줄 거예요?”

  “아니, 근데 좀 있어봐라.”

  아직 누구 돈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데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훈이 돈이 맞더라도 경희한테 사과하는 걸 보고 싶었다.

  소문을 들었는지 정훈이가 다시 왔다.

  “선생님, 제 돈 주웠다던데요.”

  “그런 돈 없다.”

  “애들이 말하던데요. 그거 제 돈인데요.”

  “무슨 소리 하노. 니 돈은 경희가 가져갔다며?”

  “저는 가져갔다는 말 안했는데요. 그냥 물어봐라고 했는데요.”

  이 말도 맞긴 하다. 하지만 경희를 의심해서 물어보라고 한 것이니 가져갔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딱 잘라 말했다.

  “하여튼 니 돈은 없다.”

  정훈이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사물함 앞으로 가더니 서럽게 울어댔다.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걸 보니 보기가 안 됐지만 좀 더 뜸을 들이기로 했다. 정훈이는 한 동안 눈물을 쏟더니 포기했는지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을 시작하려다가 아이들한테 오백 원 잃어버린 사람 있냐고 물으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미경이가 맡긴 돈은 정훈이가 놀다가 흘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정훈이를 힐끗 쳐다보니 이미 눈물이 말라있었다. 1학기 때만 해도 이런 일을 만나면 한 시간이 모자라도록 울었는데 요즘은 우는 것도 잠시다.

  “정훈아, 이거 니 돈 맞는 거 같은데 경희한테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나?”

  의외로 녀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벌써 나한테 돈을 받은 것처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해보라고 했더니 그 모습이 정말 볼 만 했다.

  “미안하다 경희야. 내가 잘못했다.”

  이런 말로 사과했는데 분위기를 살려 다시 표현하면 이렇다.

  “미안하당 경희양♪. 내가 잘못했다아아앙♬.

  소리 높낮이를 살려 마치 성악가가 노래하듯 사과하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여학생들은 징그럽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경희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약속대로 오백 원을 돌려주었더니 이번에는 덩실덩실 춤을 추듯 받아들고 갔다. 참 별일이었다.

  사과하는 모습이 하도 재미있어서 수업하다가 한 번 더 해보라고 하니 거리낌 없이 다시 노래를 불러주었다.

  “미안하당 경희양♪. 내가 잘못했다아아앙♬.

  여학생들은 또 비명을 질렀다.

  “징그러워요.”

  “자꾸 시키지 마세요.”

  그러든 말든 나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시켜서 웃었다. 기껏 교실수업이 한 시간 뿐이었지만 정훈이 덕분에 네다섯 시간 동안 웃을 웃음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