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어린왕자 2010. 11. 10. 17:59

11월 10일 수요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착각


  셋째 시간에 국어 수업을 하는데 평소와 달리 아이들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삐걱거리는 책걸상 소리를 내거나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남학생들도, 고개를 숙이고 몰래 쪽지를 주고받으며 속닥이던 여학생들도 하나같이 순한 양들 마냥 입을 다물고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고 서로의 숨소리조차 느껴지는 분위기가 낯설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날마다 이런다면 선생 노릇도 해볼 만하겠구나 싶었다.

  공부 시간에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걸 이제 알아차렸구나. 자기들 앞에서 쉼 없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선생님의 고통도 헤아릴 만큼 컸구나. 2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흐뭇한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다. 기쁨이 컸다.  

  “오늘은 정말 수업 태도가 좋구나. 모두들 너무 이뻐.”

  갑작스런 칭찬에 아이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칭찬마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차분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이런 칭찬에 잘난 척을 수 없이 했을 아이들이다.

  “그럼요, 우리가 얼마나 예쁜데요.”

  “선생님은 우릴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우리 반에서 선생님만 나빠요!”

  너도나도 한 마디씩 날리며 귀를 따갑게 만들었을 아이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눈빛과 몸짓이 살아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고, 물 머금는 스펀지처럼 내 말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제, 오늘 내가 저 아이들을 윽박질러서 이야기도 못 나눌 만큼 서먹한 관계도 아니었다.

  아!

  갑자기 짧은 생각 하나가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렇구나. 내가 왜 이런 간단한 이유를 몰랐을까. 이것도 모르고 나 혼자 착각에 빠져 있었구나. 

  평소와 다른 아이들의 행동에는 너무나 확실한 까닭이 있었다. 1교시, 체육 시간에 축구를 심하게(?) 했던 것이다. 여학생과 남학생의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제법 추운 날씨였는데도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며 넓은 운동장을 한 시간 내내 뛰어다녔다. 여학생 편에 들어가서 뛰었던 나도 그것 때문에 오전 내내 힘이 없고 말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운동량이 많다 보니 몸 에너지를 엄청 써버린 게 아이들이 얌전했던 원인이었다. 순간 방전 상태라고 할까. 마치 온 힘을 다해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나비가 날아가지 못하고 한 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머리를 쓰거나 몸을 뒤척일 힘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교시에 우리 반을 수업했던 영어선생님께 물어보니 아이들이 아주~ 얌전하게 수업을 잘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던 넷째 시간에 거의 본래대로 돌아오더니 다섯 째 시간에는 예전 모습을 온전히 되찾았다. 예상대로였다. 아이들은 또 펄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