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11월 11일 - 빼빼로데이를 대신할 날은?

늙은어린왕자 2010. 11. 12. 17:29

11월 11일 목요일 햇볕이 반투명 공기 속에 희미하게 비침

빼빼로데이를 대신할 날은?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니 내 책상 위에 빼빼로가 그득했다. 아이들은 서로 빼빼로를 주고받기도 하고 먹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많이 받은 아이는 한 가방 불룩이 담아놓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고 하나도 못 받은 아이는 눈만 껌뻑이며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벌어지는 풍경이 어린 3학년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수업 시작 전에 빼빼로데이를 올바로 아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영상물을 하나 보여주었다. 빼빼로데이가 생긴 유래와 요즘 모습, 잘못된 점과 나아갈 방향에 관한 텔레비전 방송기사였다. 나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특이한 점은 이 날이 1997년경부터 부산경남지방의 여중, 여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일본까지 퍼진 이 ‘데이’가 우리 고장에서 시작됐다는 건 처음 알았다.

  빼빼로 먹고 날씬해지라는 소박한 뜻으로 시작한 빼빼로 주고받기가 요즘은 과자회사를 도와주는 날이 되었다는 방송 내용에 공감이 갔다. 이맘 때 팔리는 빼빼로(또는 비슷한 과자)가 전국에서 800억 원어치가 넘는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아이들과 이 문제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통도 없고 뜻도 없으며 과자 회사나 상점만 도와주는 기념일이 정말 필요한 지 함께 생각해보았다.

  아이들은 ‘과자를 많이 팔려는 회사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미로 주고받은 건 알지만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절대 그걸로 친구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일부러 강조해두었다.

  앞으로는 한두 통만 사서 서로 나눠먹는 정도가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나누고 빼빼로데이를 대신할 날을 정해보기로 했다. 좋은 생각이 나오면 내가 받은 빼빼로를 선물로 준다고 하니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덤볐다. 돈이 별로 안 들면서도 날짜와 어울리는 뜻 있는 날이면 좋은 생각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생각하는 시간은 미경이 의견에 따라 11분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나온 ‘가래떡데이’나 ‘젓가락데이’는 미리 빼놓았다. 다음은 그 결과다.


○연필데이

  11이 연필처럼 길쭉해서 연필데이입니다. 연필 회사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공짜로 연필 네 자루를 나누어줍니다. 연필데이가 있으면 공부를 더 잘하게 되고 연필 쓰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글 쓰는 능력이 좋아집니다. (박규리)

  연필 네 자루를 세워놓으면 11월 11일과 같습니다. 연필을 11자루씩 줍니다. 연필데이가 있으면 글 쓰는 능력이 향상돼요. (강량희)

  11월 11일이 연필처럼 얇으니까 연필데이다. 연필을 많이 쓰지 않는 사람들은 그 날 연필을 쓰라고 정했다. 이 날에는 연필을 써야 된다. 샤프는 쓰면 안 된다. 연필을 쓰면 머리가 똑똑해지고 글을 쓰는 능력이 높아진다. (손미경)

  *같은 의견을 낸 사람 : 박찬기, 이진하, 강정훈

  *비슷한 의견을 낸 사람 : 문예진(연필 네 개로 공부하는 날)


 ○전기줄데이 (전선데이)

  전기줄 모양이 11월 11일을 닮았다. 이 날에는 전기를 아끼고 전기를 쓰지 않고 촛불이나  호롱불을 쓴다. 이 날이 있으면 전기를 아낄 수 있고 옛날에 무엇을 써서 불을 켰는 지 알 수 있다. (양현수)

  전기줄이 일자모양이 네 줄 있으니까 전기줄데이다. 이 날 하루는 전기를 아껴쓰는 데이로 하면 좋겠다. 전기줄데이가 있으면 전기요금이 떨어진다. (정수인)

  전선 네 개가 있는데 11월 11일 같아서 정했다. 이 날에는 전기를 아껴써야 한다. 공부할 때만 불을 켠다. 전선데이가 있으면 전기를 많이 안 써서 돈을 아낄 수 있다. (이윤재)

  *같은 의견을 낸 사람 : 손은서


○책의 날

  책(冊)의 한자에 막대기가 4개 있는 게 생각나서 정했다. 이 날에는 책을 4권 선물하고 책으로 놀이를 한다. 책의 날이 있으면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 쓰는 힘도 늘어나고 낱말 뜻도 알게 된다. (남경민)

  책을 세우면 11월 11일 처럼 보이고 책이라는 한자를 보니 1자가 있어서 정했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책을 많이 보면 머리가 좋아진다. (여성진)


○김밥데이

  김밥을 네 줄 놓아두면 11월 11일처럼 된다. 그 날은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선물하거나 김밥을 만드는 방법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쳐준다. 그리고 김밥의 좋은 점을 가르쳐준다. 김밥데이가 있으면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의 음식인 김밥을 잘 알게되고 김밥의 좋은 점을 잘 알게 된다. (김태현)


○고무줄 날(고무줄데이)

  고무줄을 위로 땡기면 11월 11일 같아서 정했다. 고무줄 날에는 옛날에 고무줄놀이를 떠올려보고 놀이도 해본다. 고무줄놀이는 옛날 전통놀이라서 좋다. (김수지)

  *같은 의견을 낸 사람 : 김경희


○나무데이 

  나무가 기다랗게 서 있어서 정했다. 나무 데이에는 집 화단에 조그만 나무를 심으면 된다. 나무 데이가 있으면 공기나 산소가 많아지고 여름에 더우니까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좋다. (이혜민)

  *같은 의견을 낸 사람 : 조민석, 권구완(소나무데이)


○태극기데이

  태극기 중 네 괘가 11/11 처럼 1자가 많아서 정했다. 이날에는 텔레비전에서 한 시간 마다 태극기가 나오고 애국가를 마음속으로 부른 뒤 태극기에 배운다. 그러면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강민서)


○비의 날

  비는 가늘고 1111처럼 떨어지니까 정했다. 이 날에는 비를 구경한다. 그러면 돈을 쓰지 않아서 좋다. (이수민)


○다이어트 데이

  여자들이 1자처럼 날씬해지라고 정했다. 이 날에는 아침, 점심 동안 공원에서 한 바퀴 돌아야 한다. 그러면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날씬해진다. (박가연)


  아이들 의견을 들어보니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특히 ‘연필데이’는 뜻도 좋고 돈도 적게 드니 언제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좋고, ‘김밥데이’도 식구들이 모두 모여 김밥 네 줄로 한 끼를 먹는 날로 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날’이나 ‘고무줄데이’도 즐기는 방법만 잘 생각하면 좋을 것 같고, 앞서 나온 ‘가래떡데이’나 ‘젓가락데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빼빼로데이도 처음에는 학생들이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돈 벌려는 어른들이 끼어들면서 나쁘게 변했다. 다시 처음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기 힘들다면 우리 아이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로 즐기는 건 어떨까 싶다. 물론 돈 벌려는 어른들이 끼어드는 건 사절이다.


  *‘~데이’ 보다는 ‘~날’이라는 우리말이 좋긴 하다. 하지만 ‘연필(의) 날’, ‘김밥(의) 날’처럼 부르면 ‘국군의 날’이나 ‘한글날’ 같은 국가기념일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가까운 ‘~데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