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어린왕자 2010. 11. 15. 18:04

11월 12일 금요일 맑음

부탁


  아이들이 돌아간 오후, 쓰기 시간에 쓴 아이들 글을 읽어보았다. 오늘은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글을 썼다. 부모님께 쓴 글부터 친구, 형제에게 쓴 글까지 내용이 다양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생각이 뚜렷이 엿보였다. 그 가운데 몇 편을 골라보았다.


○ 부모님


  엄마, 집에 많이 들러주세요. 엄마가 집에 많이 안 오니까 심심해요. 계속 나 혼자 노니까 집에 혼자 있으면 친구를 꼭 부르게 되고 친구랑 밖에서 놀고 싶어지고 그래요.

  엄마가 집에 많이 들러서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고 즐겁고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요. 꼭 집에 많이 들러 주세요. (김태현)


  아빠, 일요일에 우리랑 시간을 보내면서 놀아요. 그래야 아빠가 스트레스도 풀리고 낮잠도 더 많이 잘 수 있잖아요. 아빠도 일주일에 한 번 이라도 쉬어야 회사일도 더 잘되잖아요. 일요일에는 쉬어요. (권구완)


  아빠, 휴일에는 회사를 안 가시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휴일에는 엄마와 나 밖에 없으니까 심심하고 가고 싶은 곳도 못 가요. 휴일이 되면 다른 친구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놀러 가는데 우리는 놀러 가지 않으니까 심심해요. 그러니까 우리도 컴퓨터 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손미경)


  엄마 저 수민이예요. 저 부탁하나가 있어요. 제 부탁은 동생을 따끔하게 혼내주는 거에요. 왜 혼내달라면요 동생은 제 말을 잘 안 듣고 뭐만하면 제 탓이라고 하고 동생을 건들면 제가 혼나고 안 놀아 주며 일러버리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엄마 말만 듣잖아요. 그러니까 동생 좀 혼내주세요. 엄마 제 부탁 들어주세요. (이수민)


  저 부모님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저 만화 책 한 권만 사주세요. 왜냐하면 다른 친구는 ‘메이플스토리’ 41권이 있지만 나는 없어서 사고 싶어요. 괜찮으니까 꼭 사주셨으면 해요. (박가연)


○ 형제자매


  오빠 나 수지야. 제발 제발 이빨 칠 때 물을 튕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물이 눈 안에 들어가서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제발 제발 물을 튕기지 좀 말아줘. (김수지)


  경훈아 안녕? 나 너의 누나 경민이야. 네가 나의 물건을 계속 부수니까 내가 쓸 수 없어 불편해. 또 내 핸드폰을 마음대로 만져 인터넷에 들어가면 요금을 많이 내야 돼. 앞으로 내 핸드폰과 학용품을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남경민)


○ 친구


  얘들아. 남의 물건을 뺏어가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오늘 또 선생님의 귤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누가 훔쳐가 두 개 밖에 안 남았잖아. 정훈이와 민석이는 미술 시간에 한 개씩 먹었다고 자수를 했어. 하지만 나머지 두 명은 아직 자수를 하지 않았어.

  또 어제 내 책상서랍에 있던 사탕과 연필이 없어졌어. 안 훔친 아이도 있겠지만 물건을 훔친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괜찮은데 진짜 선생님 것을 뺏어가지 말아줘. 다음부턴 뺏거나 훔치지 마. 알겠지? (강민서)


  얘들아 안녕! 요즘은 선생님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많아. 오늘 누가 귤을 먹어서 벌을 섰어. 또 내꺼는 브랜드 쵸콜릿을 훔쳐갔어. 우리 반에 그런 애들이 많아졌어. 나쁜 짓도 그렇지만 남의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은 도둑이양. 제발 부탁할게. 훔치지 말아줘. (손은서)


  성진아 안녕? 나 민석이야. 성진아 너한테 부탁할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니? 수업시간에 떠드는 거 고쳤으면 좋겠어. 수업시간에 떠들면 친구들에게 방해되고 선생님께 혼나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 그리고 너의 그런 모습 때문에 쉬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랑 공부시간이 늘어나는 거랑 급식소에 밥을 먹으러 늦게 가잖아. 이런 부탁을 줘서 미안하지만 수업시간에 방해가 돼서 그런 거야. 성진아 그럼 안녕! (조민석)


  아이들 글을 읽어보니 모두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이 읽어도 기분 나쁘지 않는 문장, 알아듣기 쉬운 문장으로 잘 썼다. 모두 공부한 대로다. 이 글을 부모님, 형제자매, 친구들이 읽는다면 모두 부탁을 잘 들어줄 것 같았다.

  아이들 글을 읽으며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출근해서 교실에 들어서니 다른 날과 달리 쓰레기가 많고 청소도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어제 출장이 있어서 일찍 나가는 바람에 청소지도를 제대로 못한 탓이었다.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것도 문제지만 자기가 쓴 빗자루나 쓰레받기를 제자리에 챙겨 넣지 않고 간 걸 보니 기분이 언짢았다. 더군다나 책상 위에 두었던 귤 여섯 개 가운데 네 개나 없어진 걸 보니 그만 화가 났다. 안 그래도 내가 쓰는 가위나 볼펜, 칭찬 사탕이 알게 모르게 없어져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귤이 여섯 개 있었는데 왜 두 개 밖에 없을까? 난 먹으라고 준 적이 없는데 누가 남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을 댔지? 먹은 사람 일어나봐!”

  화난 목소리가 느껴졌는지 아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교실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그건 도둑질이야. 난 도둑들 하고는 도저히 수업할 수 없어.”

  목소리가 높아지자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쥐죽은 듯 앉아있었다.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은 진짜 도둑이지만 잘못을 솔직히 말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니야. 지금 일어서면 용서하지만 내가 알아내면 진짜 도둑이 되는 거야.”

  윽박지르기가 통했는지 정훈이와 민석이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두 녀석은 어제 각각 하나씩 먹었다고 솔직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머지 귤을 먹은 사람을 찾아내려고 다시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귤을 먹었다는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좋아. 그럼 먹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쉬는 시간에 카드놀이나 알까기를 금지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청소나 숙제를 안 하면 남아서 하거나 벌도 줄 거야. 수업 시간에 떠드는 것도 절대 용서가 없어.”

  이렇게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언짢고 화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민석이와 정훈이에게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만 받고 용서해주었다. 그리고는 부탁하는 글쓰기 공부에 들어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침에 내가 했던 행동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 말할 때는 실컷 화를 내놓고 부탁하는 글쓰기를 하라고 할 때는 남이 거부감을 가지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뜻이 잘 전달되는 문장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으니 말이다.

  “여러분에게 두 가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하나는 청소입니다. 자기가 맡은 청소는 깨끗이 해주고 쓰레받기나 빗자루는 제자리에 넣어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남의 물건에 손대는 문제입니다. 내 물건이 소중하면 남의 물건도 소중한 법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주인에게는 소중한 것이니 절대 남의 것에는 손을 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깔끔하게 이렇게 부탁할 수는 없었을까. 언제나 화를 내고 나면 그만큼 후회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