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11월 19일 - 성진이의 결심

늙은어린왕자 2010. 11. 19. 19:11

11월 19일 금요일 엷은 구름 조금

성진이의 결심


  아침에 성진이가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선생님, 어제 쓴 일기에요. 이제부터 일기 쓰려고요.”

  성진이는 여태껏 한 번도 일기장을 가져온 적이 없다. 게다가 글쓰기를 어려워해서 매주 두 번 하는 글쓰기 시간이면 끙끙거리기만 하던 성진이가 일기장을 쑥 내밀어서 솔직히 놀라웠다.

  일기장을 펼쳐보니 어제 쓴 일기 한 편이 있었다. 평소와 달리 또박또박한 글씨에 분량도 줄 공책 한 바닥을 가득 채웠다.

  “성진아, 정말 잘 생각했다. 그리고 글씨도 또렷하게 아주 잘 썼구나.”

  아이들한테 일기장을 보여주었더니 아이들도 모두 놀라워했다. 어떤 아이들은 글씨가 너무 깔끔하다며 엄마가 대신 써준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글도 읽어달라고 하도 졸라서 성진이 허락을 받아 읽어주었다.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맑고 쌀쌀하다.

학교에서 울었다.


  읽기 시간에 프레드릭을 읽고 의견과 까닭을 쓰려고 하는데 심심해서 용은이를 건드리고 용은이가 의자를 들길래 실내화를 의자 밑에 넣었더니 용은이가 갑자기 의자를 내려서 발등이 의자에 찍혀서 너무 아프길래 아프다고 말했다. 용은이가 다시 의자를 올렸는데 난 실내화를 빼지 않고 발만 뺐다. 용은이가 다시 의자를 내리자 난 발이 의자에 찍히지 않아서 “않 아프지롱.” 이라고 말했는데 용은이가 의자를 들지 않아 실내화가 빠지지 않아서 손으로 뺐다. 실내화를 신으려는데 용은이가 실내화를 뺏어서 앞에 던졌다. 내가 실내화를 신자 선생님이 글을 바꾸면서 읽으라고 하셨다. 은서가 선생님한테 “글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X 세 게 해.”라고 하셔서 용은이 윤재 은서가 X를 크고 많이 적어서 울어버렸다. 울면서 나는 왜 여자에들 말을 듣고 내맘대로는 못할까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다 쓰고 마지막에 ‘윤재, 용은, 은서 미워’라고 썼다.


  일기를 읽어보니 힘센(?) 여학생들에게 당한 일 때문에 성진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해가 됐다. (어제는 급하게 점심 먹으러 가느라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글을 쓰지 못했어도 한 바닥 가득 가위표를 받으면 누구라도 억울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둠 친구들이 모두 성진이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해주었다.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동기가 궁금해서 쉬는 시간에 성진이를 살짝 불렀다.

  “성진아, 일기 정말 잘 써왔어. 근데 엄마가 쓰라고 했어?”

  “아뇨. 제가 쓰려고 했는데요.”

  “그렇구나. 스스로 마음먹었다니 더 좋구나.”

  쑥스러워 하는 성진이를 들여보내고 칭찬 도장과 함께 느낌을 간단히 써서 주었다. 성진이가 공책을 받아들더니 말했다.

  “내일도 쓰고 내일모레도 써야지.”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흐뭇하고 기뻤다. 꾸준히 써나가는 성진이 모습을 기대해본다.

  

[덧붙임]

  글은 말보다 힘이 셉니다.

  만약 성진이가 일기를 쓰지 않았으면 아무도 성진이의 억울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성진이는 억울했던 일을 글로 써서 모두가 알게 되었고 너도나도 성진이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모둠 친구들에게 사과도 받았으니 일이 잘 풀렸지요.

  성진이 글을 읽으며 나도 두 가지 반성을 했습니다. 하나는 어제 수업 시간에 친구들이 쓴 글에 별표를 줄 때 홧김에 가위표를 주라고 한 것인데, 앞으로는 가위표는 절대 주지 말라고 할 생각입니다. 별표 숫자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됐다, 부족하다는 점을 표시할 수 있으니 가위표는 필요 없겠지요. 가위표는 괜히 받는 사람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어제 성진이가 급식을 안 한 것도 몰랐던 점입니다. 성진이가 울고 있을 때 급식 시간이 되어 모두들 허겁지겁 급식소로 가버리는 바람에 성진이는 혼자서 교실에서 울고만 있었답니다. 한 번 만이라도 교실을 둘러보고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요. 정말 성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 전합니다. 성진이가 일기를 쓰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요?

  글은 역시 힘이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