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 말 시키지 마라?
4월 19일 화요일
말 시키지 마라?
오후에 교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선생님.”
어떤 여학생이 교실로 들어서며 나를 불렀다. 누군가 방과 후 수업 갔다가 가방 가지러 온 것 같았다.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말 시키지 마라.”
잠깐 교실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다시 여학생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니-임.”
순간 뭔가 다른 느낌이 확 밀려왔다. 쿵쾅거리는 발소리, 미주알고주알 재잘거리는 소리, 뭐하냐고 묻는 소리…. 평소에 아이들이 들어올 때 들려오던 소리가 전혀 없는데다 살며시 부르는 목소리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찜찜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세상에! 한 모녀(미경이와 미경이 어머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미경이 어머니….”
그러고 보니 오늘은 미경이 어머니가 도서실 도우미 활동 하시는 날이었다. 일마치고 가시다가 교실에 들른 것 같았다. 교실에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돌덩어리처럼 앉아서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만 봤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반 녹색어머니 날짜가 언젠가 싶어서예.”
“아, 그래요? 어디 보자. …….”
정신없이 달력을 집어 들었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날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달 말이라 카던데예.”
“그렇-죠? 보자… 아, 여기 안 적어놨네?”
대화는 계속 엉뚱한 곳을 헤맸다. 우여곡절 끝에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겨우 날짜를 확인시켜드리긴 했는데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학년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오후에 일 하는데 아이들이 들어오면 무조건 쉼터로 가라고 해요.”
“예전에는 아이들이 교실이 남아있으면 좋았는데 요즘은 그냥 집에 일찍 가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있으면 일을 못하니까요.”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하는 까닭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인데 아이들이 없어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많은 일이 쏟아지는 현실 때문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꼽아보니 정말 산더미 같았다. 학급경영록 결재 받는 날인데다 전산으로 1년 치 시간표를 모두 입력하기, 봄 현장학습 계획서 만들어내기, 지난주에 했던 학부모 공개수업 평가서와 학부모 협의록 써 내기, 여기에다 김해시 과학탐구대회에 참가할 아이와 물로켓 날리기 연습도 해야 하고 중간고사 시험문제도 내야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이 많더라도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면 따뜻하게 맞아주고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건네주는 게 교사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말 시키지 마라.’고 한 내 행동은 앞으로는 결코 다시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