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5월 23일 - 편지쓰기

늙은어린왕자 2011. 5. 30. 10:17

 

5월 23일 월요일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편지쓰기

 

  듣기말하기쓰기 시간에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했다. 교과서에는 웃어른께 편지쓰기를 쓰도록 해놓았는데 먼저 친구들에게 쓰도록 한 까닭은 컴퓨터 생활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이 종이로 마음을 전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에 손으로 쓴 편지로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어보면 좋은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편지쓰기를 합니다. 부모님께는 저번에 먼저 썼지요?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쓸 거예요. 근데 선생님께 편지 쓰기 전에 먼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올 것이 왔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또 글 써요?”
  “두 가지나 써야 돼요?”
  지난 주 토요일에 보던 만화영화를 마저 보자고 아침부터 졸라대는 걸 무시했다고 안 그래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그것도 두 종류나 쓰자고 했으니 당연히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친구들하고 편지를 주고받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짧게 써도 되는 엽서를 준비했으니 우선 쓸 사람을 정해보세요.”
  뒷면에 세밀화가 그려져 있는 예쁜 엽서를 나눠주자 아이들의 관심이 갑자기 그림으로 옮겨갔다.
  “저는 학 그림 주세요.”
  “저는 독수리요.”
  엽서를 모두 나눠주고 편지 쓰는 형식을 잠깐 점검한 뒤 이제 편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 내키지 않아하던 아이들도 쓰면서부터는 재미가 붙었는지 쫑알거리며 써나갔다.
  그런데 문득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쓸 대상을 자유롭게 정해서 쓰기 때문에 아무래도 편지를 못 받고 소외되는 아이가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뒤늦게 짝을 정해서 쓰는 것도 우스워보였다.
  “잠깐 부탁이 있는데, 쓰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 한 사람에게 여러 명이 몰려서 편지를 못 받는 사람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한 장씩 더 줄테니까 한 장은 꼭 쓰고 싶은 사람에게 쓰고, 다른 한 장은 편지를 못 받을 수도 있겠다는 사람에게 써보세요.”
  갑작스런 제안이었는데도 아이들은 기꺼이 엽서를 받아갔다. 희망하지 않는 몇몇 아이들은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쓴 편지는 모두 우체통에 넣도록 했다. 우체통이라고 해서 길거리에 서 있는 것처럼 빨간색 통은 아니고 희지가 화분 들고 올 때 쓴 투명 비닐 백에  검은 봉지를 싸서 급히 만든 것이다.
  엽서가 다 들어왔을 때 내가 임시 집배원을 맡아 우편함에서 한 장씩 꺼내며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언제 자기 이름이 불릴지 마음을 졸이다가 전해주는 엽서를 받고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편지 쓰자고 했을 때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모두 나눠준 뒤 받은 개수를 알아보았더니 한 장만 받은 아이도 있고 다섯 장을 받은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한 통도 못 받은 아이가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겠다 싶어서 못 받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쓸 사람을 신청 받아 써 주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친구의 손길이 닿은 엽서를 받는 기쁨이 컸던 것일까? 아이들이 자꾸 빈 엽서를 받으러 나왔다. 이제 못 받은 아이도 없고 안 써도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받아갔다. 받은 만큼 답장을 보내야 한다며 가져간 아이가 가장 많고 나중에는 답장에 답장을 써야 한다고 받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단순히 예쁜 엽서가 욕심이 나서 가져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무 조건 없이 가져가도록 했다. 열두 장씩 들어있는 엽서 네댓 묶음이 가을바람에 낙엽 날리듯 금세 훌훌 날아갔다.
  아끼던 엽서들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마음을 주고받는 걸 보니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수업은 선생님께 편지쓰기로 이어진 뒤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