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 애정남
10월 12일 수요일 구름 조금, 텁텁한 공기
애정남
요즘 개그콘서트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다. ‘애매한 것들을 정해주는 남자들’을 뜻하는 말로 남녀 사이의 문제를 재치 있게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우리 집에는 TV가 고장 나서 보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 입소문을 듣고 인터넷에서 몇 번 본 적 있다.
어제 학급회의를 한 뒤 ‘여학생들의 폭력(?) 문제’가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남학생들의 하소연이 줄을 이었다. 여학생들은 이런 남학생들을 보고 언제 폭력을 썼냐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섰다. 여학생들이 때리는 것 가운데 폭력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애정남’이 되기로 했다.
“여러분 애정남 알죠? 개콘에서 하는 거. 지금부터 내가 남학생이 될 테니 여학생들이 나와서 평소에 남학생들에게 하듯이 나를 때려보세요. 어떤 게 애정표시이고 어떤 게 폭력인지 정해줄 테니까요.”
여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남학생들도 솔깃하게 받아들였다. 희망자 가운데 ○○이를 불러냈다. ○○이는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내 옆구리를 주먹으로 ‘퍽’ 쳤다.
“아아, 이건 폭력이야.”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내가 옆구리를 잡고 인상을 찌푸리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남학생들은 바로 자신들이 당하는 거라며 소리쳤다.
“이건 너무 심해. 남학생들이 평소에 이렇게 맞는단 말야? 이제 살살 때려봐.”
다시 ○○이가 웃으며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탁탁 쳤다.
“그래, 이건 애정 표시야. 남학생들 봤지? 살살 웃으며 이렇게 한두 대 때리는 건 폭력이 아니야. 애정을 표시하는 거야.”
남학생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반발했다. 애정 표시란 말에 닭살이 돋은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아픈데요. 그것도 폭력이에요.”
“에이, 이런 걸 폭력이라고 하면 안 되지. 하여튼 이제부터 이건 애정표시다.”
이제 발차기로 넘어갔다. 같은 방법으로 폭력과 애정표시를 구분했다. 발차기를 보여줄 때 ○○가 발바닥으로 내 무릎을 차는 바람에 다리가 휘어질 뻔 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공격을 하면 위험하다고 일러주었다.
세 번째는 ‘헤드락’이었는데 의외로 이 기술을 쓰는 여학생이 많았다. 여학생들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남학생들에게 표현을 하고 있었다. ○○이와 ○○이가 능숙한 솜씨로 시범을 보였다.
근데 팔로 목을 조이며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도 있나? 이건 개콘에 나오는 진짜 애정남한테 물어볼 만한 문제였다.
이제 다 했다고 생각하고 마치려는데 남학생들이 잇따라 손을 들었다.
“팔 꺾기는요?”
“팔꿈치로 내려치기는요?”
“무릎 공격도 있어요.”
“손톱으로 할퀴기도요.”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기술들이 튀어나왔다. 교실이 무슨 이종격투기장도 아니고 그것도 남학생이 아니라 여학생이 쓰는 기술이라니! 애매할 것도 없었다.
“그런 건 전부 폭력입니다. 특히 팔꿈치와 무릎 공격은 절대 하면 안 되고, 손톱으로 할퀴기는 칼 들고 덤비는 거 하고 똑같아요.”
내가 과감하게 정리하자 남학생들이 환호했다. 몇몇 남학생들은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소리치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애정남’ 노릇을 끝냈다. 아까 맞은 다리가 아직 후덜덜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