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 구멍 난 빼배로데이
11월 10일 목요일 구름 많음
구멍 난 빼빼로데이
“아무리 상술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이들 주려고 벌써 30개나 샀단 말이에요.”
“선생님 이제부터 미워할 거예요.”
알림장에 ‘내일 학교에 빼빼로 들고 오지 않기’라고 쓰자 말자 교실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내일이 ‘빼빼로데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날벼락이 떨어진 탓이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1자가 여섯 개나 되는 밀레니엄 빼빼로데이란 말이에요. 천 년에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구요!”
늘 차분하던 (안)유진이도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평소에 웃음을 잃지 않던 경은이는 원망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작은 야단에도 눈물을 잘 흘리는 수지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인터넷에서 주문해서 벌써 왔단 말이에요.”
울먹이는 수지를 대신해서 옆에 있던 아이들이 대신 소리쳤다. (정)현민이도 아이들에게 줄 빼빼로 수십 개를 미리 사 놓았다며 나눠줄 수 있도록 해달라며 사정했다.
나는 아이들의 항의를 뒤로하고 옆 반에도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며 아이들을 지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한테 11월 11일이 농민의 날이자 지체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며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실 11월 11일은 숫자 생김새만 보면 참 매력이 있다. 누구든지 꼿꼿이 선 숫자 네 개를 보며 재미있는 상상을 했을 법하다. 지금 유행하는 ‘빼빼로데이’도 십여 년 전에 여중생과 여고생들이 일(1)자처럼 날씬해라며 비슷하게 생긴 ‘빼빼로’를 주면서 유행했으니 말이다. 가만히 두었으면 이렇게 재미있고 순수한 유행이 이어졌을 텐데 돈을 노린 과자업체들이 끼어들면서 오염된 게 안타깝기까지 하다.
학교에서 ‘빼빼로데이’를 막는 건 이미 본래 뜻을 잃고 오염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온 학교가 하루 종일 시장바닥처럼 시끄럽고 쓰레기도 엄청나게 나온다. 또 많이 사지 못한 아이들과 많이 받지 못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큰 문제다.
“지난해에 여러분이 3학년일 때 빼빼로데이에 관해 아이디어를 받은 적이 있지요. 재미있는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연필데이, 책(冊)의 날, 김밥데이, 고무줄의 날, 나무 데이, 비의 날, 다이어트 데이 등이 있었지요. 나는 마지막의 다이어트데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면 좋겠는데…‥.”
아이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급식소에 가서도 화를 삭이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심지어 옆 반 아이들까지 떼로 몰려와서 항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빼빼로’를 준비할 생각도 없었던 몇몇 악동들은 성난 아이들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랜만에 좋은 말씀 했다느니 선생님을 존경하게 됐다느니 아부를 늘어놓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급식을 마치고 부모님들께 협조 문자를 보냈더니 한 어머니께서 ‘빼빼로’ 대신 귤을 보내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 정도는 좋겠다고 답을 드렸다. 그리고 미리 반 아이들 숫자만큼 사 놓은 (정)현민이와 수지한테는 내일 가져와서 맡겨놓았다가 간식 먹고 싶은 날 먹자고 제안했다. 현민이는 좋아라 하는데 수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갖다 놓으면 녹는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며칠 전부터 빼빼로데이에 관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학예회에 정신이 팔려 말하지 못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자료를 함께 살펴보았다면 오늘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 같다. 이 점이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