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에 얽힌 추억
탱자나무에 얽힌 추억
아, 이제는
환한 가을 햇살 아래
노오란 금빛 단추를 달고
자랑스럽기만 한
탱자나무야.
탱자나무야.
읽기 시간에 아이들과 시 공부를 하다가 문득 탱자나무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자란 곳은 밀양의 어느 산골이다. 찻길이 없어서 자동차 구경을 못한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궁색한 곳이었다.
우리 마을은 '새마'라고 불렀던 곳이다. 20가구 정도가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살던 정겨운 곳이다. 작은 마을치고는 또래 아이들이 꽤 많았는데 내 동갑내기만 해도 넷이나 되었다. 그러나 남자는 나를 합해서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형, 동생들과도 쉽게 어울리곤 했다. 나와 가장 잘 어울린 동무는 바로 옆집에 살았던 한 살 많은 형과 그 옆집에 살았던 동갑내기 그리고 두 살 아래인 그의 동생이었다.
우리는 날만 밝으면 잠잘 때까지 같이 놀았다. 참꽃 따먹기, 버들피리 만들기, 찔레 순 따기, 냇가에서 미역 감기, 고무신 차 놀이, 술래잡기, 활 만들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딱총 만들기, 팽이 돌리기, 자치기, 산에 올라 열매따기, 얼음지치기, 눈썰매 타기, 연날리기, .... 놀잇감을 찾고, 만들고, 놀기까지 모두 함께였다.
그런데 우리 넷 가운데 옆집의 형은 좀 사나운 면이 있었다. 힘이 세어서 '산돼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와 늘 같이 놀았지만 조금 거리도 있었다. 잘 놀다가도 툭하면 심술을 부려 판을 깨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예를 들어 구슬치기를 하다가도 자기가 따면 놀이가 계속되는데 자기가 잃으면 일부러 던져서 구슬을 깨거나 발로 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자기가 잃은 것을 힘으로 되찾기도 하였다. 딱지치기나 팽이 돌리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놀이에서도 상황은 똑같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같이 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술래잡기나 자치기 같은 놀이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놀이를 하려면 적당한 사람수가 있어야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산돼지'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산돼지'의 강요로 놀이를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산돼지'를 제외한 우리 셋은 파랗게 뒤덮힌 보리싹 위에 드러누워 놀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셋이서 힘을 합쳐 '산돼지'를 혼내주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전날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했는데 우리가 그 '산돼지'한테 다 잃거나 빼앗긴 일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뜻을 모았다. '산돼지'를 불러내어 보리밭에 넘어뜨려서 발로 밟아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동갑내기 친구가 혼자 가서 그 형을 불러왔다. 나와 동갑내기의 동생은 보리밭에 누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형과 동갑내기가 저만치 올 즈음 만약 일이 잘못돼서 그 형한테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그 형이 가까이 왔다. 동생이 먼저 공격을 해서 그 형의 다리를 걸어 넘겼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와 동갑내기가 형의 몸 위에 올라탔다. 동생은 다리를 잡고 나와 동갑내기는 얼굴과 가슴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의 얼굴은 눈물과 흙이 범벅이 되었다.
일을 끝내고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동갑내기 형제는 자기 집으로, 나는 우리 집으로 뛰었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뭔가 큰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 형이 벌일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숨은 지 한참이 지났을까. 밖이 잠잠해서 살짝 골목으로 나와보았다. 동갑내기 친구 집을 가려면 그 형 집 대문 앞을 지나야 하는데 큰마음을 먹고 살금살금 갔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저 쪽 골목 끝에서 그 형이 아직 눈물 범벅이 된 채 한 손에 커다란 돌멩이를 들고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당황하였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짝 마른 탱자나무였다.
그 형 집 대문 앞에는 약재로 쓸 함박꽃이 가득했던 자그만 밭이 있었다. 우리 밭이었는데 울타리가 모두 탱자나무로 둘러쳐 있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잡은 다슬기를 삶아 알을 빼먹을 때 그 탱자나무의 가시를 이용하곤 하였다. 탱자나무 울타리 한 귀퉁이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았는데 그 입구를 바짝 마른 탱자나무로 가려두곤 하였다. 바로 그것을 손에 든 것이다.
그 형이 다가오자 나는 뒷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사정없이 머리에 내리쳤다. 그 형의 빡빡 깎은 머리와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뛰었다. 이번엔 정말 큰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뒤에 숨어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한 참을 지나자 그 형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지만 꼼짝 않고 있었다. 저녁 무렵, 일하러 갔다 오신 부모님에게 들켜서 정말 혼이 많이 났지만….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곧 탱자나무에 '노란 금빛 단추'들도 달릴 것이다. 올 가을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탱자의 쓰고 신맛을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200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