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소리
휘파람소리
어제 퇴근길에 일어난 일이다. 여느 때처럼 차를 아파트 앞 주차장에 대놓고 나서려는데 아주머니 두 명이 현관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깊은 이야기에 빠진 듯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아주머니 두 명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막 문을 닫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4층 밖에 안되는데 걸어갈까 생각하다가 이왕 문이 열린 김에 올라탔다. 아주머니 두 사람은 그 때까지도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는 순간 한 아주머니의 말이 귀에 언뜻 들어왔다.
“…이 맨날 시도 때도 없이 휘파람을 불어대는기라. 그 소리가…”
나는 ‘휘파람’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혹시 저 말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내가 4층 단추를 누르는 순간 열변을 토하던 아주머니의 말이 갑자기 뚝 끊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가지고 우리 ○○ 아빠가…읍”
그리고는 입을 막고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몇 초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추측이 사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아파트에서 휘파람 부는 사람,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 휘파람을 제가 잘 불거든예. 요즘은 아파트에서 안불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더.”
“!…‥.”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뒤의 아주머니를 보며 말을 건네자 당황해하는 눈빛으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았다.
사실 며칠 전에도 휘파람 때문에 일이 있던 터였다. 두 달 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오고 처음으로 앞집에 사는 부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우리 부부를 보더니 아저씨가 대뜸
“요즘 좋은 일이 많으신가 봐요. 휘파람 소리가 늘 울리던데...언제 술 한잔 합시다.”
하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네는게 아닌가.
“인사가 늦었네예. 신혼부부라서 조금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하고 얼무버리긴 했지만 휘파람 때문에 신경을 쓰게 한 것같아 미안했다.
짧고도 긴 시간이 흘러 엘리베이터는 4층에 도착했다.
“안녕히 가세요. 휘파람 조심할께예.”
먼저 인사를 하고 내리는데 그제서야 숨을 죽이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 아뇨. 휘파람 계속 부세요. … 금실 좋다고 소문 났던데예.”
아주머니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짐작컨대 아주머니는 우리 앞집 아주머니한테서 내가 휘파람을 불고 다니는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집에서 아내와 나는 이 이야기로 한바탕 웃어댔다. 특히 그 아주머니가 열을 내어 말하다 입을 막고 눈치를 보는 행동을 흉내내자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봐요. 아파트에서는 휘파람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내는 재미 있으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 가지 이상의 습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 가지 습관이 있지만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습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휘파람을 부는 것이 어떻게 습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다소 독특하고 심각하기까지 하다. 의식하고 부는 것보다 무의식 중에 부는 휘파람이 더 많기 때문에 갖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이다.
2년 전의 일이다. 총각 시절이라 업무를 본다는 핑계로 밤에도 학교에 남아 있는 일이 잦았다. 그 날도 어두워지도록 교실에 남아 일을 보고 있었다. 8시가 조금 지났을까. 학교 뒤에 있는 암자쪽에서 어떤 여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무심코 들었다. 암자 앞에 있는 약수터에 사람들이 늘 오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계속 소리가 나 밖을 내다보니 비구니인듯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목청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 좀 내지 마라 안카는교. 신경 쓰여서 기도를 못하겠다!”
그 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다.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하루 이틀도 아이고 언제까지 불라카노!!”
참아온 분노를 한꺼번에 뱉어내는 듯 격한 목소리였다.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서둘러 사과를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 일이 있은 뒤 조심했는데도 서무과장님으로부터 밤에 휘파람 분다고 절에서 전화가 왔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절에서 내려온 신도와 또다시 얼굴을 맞댄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십 수년간 휘파람과 싸워온 경험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 고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휘파람을 분다고 친구들로부터 눈총도 많은 적도 많았다. 또 동네 어른이나 집안 사람들로부터 상스럽다, 재수 없다는 핀잔을 듣는 것은 이제 그저 노래소리로 들릴 뿐.
휘파람을 불면서 언제나 나쁜 경험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휘파람소리는 내 상징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반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온다는 것을 휘파람 소리로 알아차린다.
“휘파람 소리 나면 선생님이 오시는 걸 다 알아요.”
아이들은 한결같이 휘파람 소리로 나를 알아차린다고 한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이선생님은 맨날 좋은 일만 생기는갑다. 발만 뗐다 하면 휘파람 소리가 나니…”
이제 이런 말은 선생님들이 내게 건네는 인사가 됐다.
내게 볼 일이 있는데도 못찾고 있을 때 나의 휘파람 소리는 선생님들에게 요긴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휘파람은 내 생활에 활력소가 될 때가 많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서 노래를 듣듯이 나는 휘파람을 분다. 불려고 해서 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온다. 그러면 일처리도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휘파람은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인 것이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부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다. 특히 학교 교실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같은 곳에서 말이다.
어제 엘리베이트에서 만난 그 아주머니가 하려다 만 말이 참 궁금하다. ○○ 아빠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좋은 뜻이었을까, 나쁜 뜻이었을까?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2000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