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 아홉 살 꼬맹이들의 선거
아홉 살 꼬맹이들의 선거
#장면 하나 - 봉사위원 선거
아침부터 교실은 선거분위기로 달아올랐다.
"한 사람이 네 명 뽑아도 돼요?"
후보로 나갈거라는 세은이는 복도에서 서성이며 누구를 뽑을까 고민에 빠졌다.
"저는 (후보들이 말)하는 거 보고 뽑을 거예요."
아정이는 후보를 보고 결정하겠다며 신중하게 말했다.
"이제 말할 거 다 외웠어요."
도은이는 후보로 나오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모양이다. 어렵게 부탁해 살짝 훔쳐 본 종이에는 유세 때 말할 내용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드디어 1교시. 연구실에서 투표용지를 받아오자마자 선거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TV 화면에 '1학기 봉사위원 선거'라고 글씨를 커다랗게 띄웠다. 아이들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선거를 기다렸다.
"봉사위원이 뭐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나? 우유도 갖다 주고 청소도 해준다 아이가."
잠깐 논쟁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차분하게 선거를 받아들였다.
"봉사위원은 우리 반을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옛날에는 반장이라 하고 한 사람만 뽑았지만 요즘은 좀 더 많이 뽑아서 봉사를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요. 봉사위원이 됐다고 해서 우유를 갖다 주는 건 아니에요. 우리 반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아이들은 알듯 모를 듯한 내 설명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거'의 뜻에 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후보가 될 사람을 불러내자 14명이나 나왔다. 여기서 3명이 들어가고 다시 한 명이 나와 12명이 후보가 됐다.
"우리 교실을 깨끗하게 하겠습니다."
"친구들이 싸우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는 반을 만들겠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맡은 일을 성실히 하겠습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고 행복한 반을 만들겠습니다."
후보들은 저마다 준비한 '공약'을 발표했다. 아이들은 후보들이 말하는 내용과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발표가 끝나고 내가 '투표'와 '비밀선거'의 뜻을 설명했지만 아이들의 눈은 이미 투표용지에 쏠렸다.
"같은 사람 두 번 쓰면 안 돼요?"
"후보는 자기 이름 못 써요?"
아이들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같은 이름을 두 번 쓰면 무효가 된다, 후보도 자기 이름 쓸 수 있다고 일일이 설명하자 아이들의 '선택'은 끝났다.
잠시 뒤 내가 빈 상자를 들고 교실을 한 바퀴 돌자 아이들이 투표용지를 모두 넣았다.
"이제 개표 할 텐데 12명 가운데 네 명만 봉사위원이 되고 나머지는 떨어집니다. 하지만 떨어졌다고 슬퍼하지 말고 2학기 때 또 도전하세요. 2학기 때 안 되면 3학년 때 하면 되겠지요?"
행여나 떨어져 울 아이들이 있을까봐 용기를 북돋워주고 개표에 들어갔다. 개표는 오늘 우유 당번이 하기로 했지만 마침 우유당번이 후보여서 그 다음 번호인 명신이와 무성이가 도왔다.
개표가 시작되자 온 아이들의 눈이 이제 칠판으로 쏠렸다. 후보자들 이름 옆에 줄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비명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고 기쁨에 겨워 책상을 치기도 했다. 개표가 절반 쯤 이루어지고 당락이 눈에 드러나면서부터는 이런 소리가 더욱 커졌다.
"선생님, 민채랑 도은이는 귀신이에요."
"왜?"
"표를 많이 받았잖아요."
세은이는 표가 많이 나오는 민채와 도은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본희도 귀신이겠네? 도은이랑 표가 똑같잖아."
내 말에 아이들이 한 바탕 웃었다.
민채, 도은이, 본희, 다빈이는 중간부터 표가 많아지더니 개표가 끝날 때까지 앞서서 결국 봉사위원으로 당선됐다. 당선된 네 아이들은 봉사를 더욱 잘 하겠다는 뜻으로 아이들한테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장면 둘 - 진정한 봉사위원
봉사위원 선거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있으니 경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빗자루를 들고 교실 이곳저곳을 쓸고 있었다.
"경호야, 왜그러니?"
"....."
경호는 말 없이 눈만 껌뻑거렸다. 하지만 커다란 눈망울에 마음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갑자기 청소하고 싶어진거야?"
"네. 교실에 쓰레기가 많아서 봉사하려고요."
경호는 봉사위원 떨어진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렇게 봉사를 잘하는데 봉사위원이 안 돼서 서운한 마음을 봉사로 달래고 있다고 해야할까?
"경호는 봉사위원이 안 됐지만 이렇게 봉사해주니까 봉사위원 못지 않아. 정말 고마워."
위로하는 말을 했지만 경호는 여전히 섭섭한 표정이었다.
"봉사위원으로 뽑혔으면 딱인데."
"그러게 말이야."
옆에서 지켜보던 나연이와 가영이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2학기 때 또 도전해봐. 뽑아줄께."
나연이 말에 힘을 받았을까? 경호는 조금 전보다 밝은 표정으로 다시 비질을 했다.
"나도 같이 할께!"
"나도!"
교실을 쓸던 경호가 복도로 나가자 이번에는 봉사위원으로 당선된 도은이가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또 남학생 몇 명이 복도로 나갔다. '봉사특공대'가 따로 없었다.
"선생님, 신발장에 이렇게 먼지가 많이 모여있어요."
"그렇구나. 먼지가 많으니까 적당히 청소해라."
아이들은 먼지를 아랑곳 않고 신발장을 쓸었다. 조금 있으니 아예 흙받이를 꺼내 깨끗이 비우고 있었다.
"밖이 와이래 시끄럽노!"
'봉사특공대' 활동으로 복도가 떠들썩하자 옆 반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알듯모를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문을 닫았다.
비록 오늘 봉사위원 선거에서 네 명만 당선됐지만 이 정도라면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진정한 봉사위원'이 아닐까? (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