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10월 1일 - 성웅이는 왜 머리가 복잡했을까?

늙은어린왕자 2014. 11. 21. 16:15

[교실풍경]
성웅이는 왜 머리가 복잡했을까?


수학 시간에 구구단 왕 뽑기를 하고 있는데 성웅이가 다가와서 하소연한다.

"선생님, 머리가 복잡해 죽겠어요."

맨 뒷자리에 있는 성웅이가 먼 걸음(?) 달려온 걸로 봐서 뭔가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일까?

"다른 일도 많은데 구구단까지 외워야 해서요."

여태껏 구구단을 공부하긴 했어도 막상 놀이를 하려니 은근히 압박이 되는 모양이다. 게다가 상품으로 과자까지 걸려있으니 그 정도가 더하리라.

놀이는 구구단을 잘 모르는 아이들을 배려해서 1~5단부, 1~7단부, 1~9단부 이렇게 3단계로 나눠서 한다. 성웅이는 1~5단부에 신청했다.

"근데, 어떤 일이 많아?"
"엄마가 말한 거 다 해야 돼요. 학교 마치면 눈높이 공부방 가야 하고요, 집에 가서 동생 기다리기, 돈 들고 동생 병원 데리고 가기, 진료받으면 약국 갔다가 집에 가야 돼요. 또 엄마 오면 태권도 가야 하고요."

성웅이는 이 빠진 잇몸 틈새로 쒸익쒸익 바람 소리를 내며 할 일을 늘어놓는다. 언뜻 들으면 복잡한 것 같은데 간단히 줄이면 눈 높이 갔다가 동생 데리고 병원 가는 것이 오후에 할 일이다. 진료받고 약국 가는 건 병원 가는 것과 한 세트니까 말이다. 태권도 가는 건 엄마 오고 나서 할 일이니까 구태여 기억할 필요는 없을 테고.

"우와! 진짜 할 일이 많네. 근데 이걸 다 어떻게 기억해?"
"저는 엄마가 말한 거는 다 기억해요."
"동생도 돌보고 참 대단해. 이렇게 일도 많은데 구구단까지 외우려니까..."
"머리가 복잡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성웅이는 동생 잘 돌본다는 칭찬 한 마디에 만족하고는 자리로 들어간다. 엄마가 일러둔 일을 줄줄 늘어놓는 걸 보니까 기억력이 참 좋은 것 같은데 구구단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어쨌든 머리가 복잡한 진짜 이유는 구구단 때문이다.

우리 반에는 성웅이처럼 구구단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 오늘 놀이를 해보니 1~9단부에는 7명, 1~7단부는 4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1~5단부에 참가했다. 자신이 아주 없는 몇몇 아이는 참가하지 않았다.

아마 1~5단부나 1~7단부에 참가한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성웅이처럼 조금은 마음에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성웅이처럼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 선에서 이런 활동이 적절한 자극이 되어 아이들이 구구단에 한 발 다가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10월 1일)


*굳이 철학을 밝히라면 저는 어른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구구단을 당장 달달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말을 들어보니 19단까지 훈련시키는 학교 밖 어떤 곳도 있다고 하더군요. 구구단은 원리나 방식을 알고 있으면 저절로 형성되는 지식일 뿐이고 계산 과정에서 편리하게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지요. 따라서 서구 선진국에서 수학 계산할 때 계산기를 쓰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구구단도 벽에 붙여 놓고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면서 문제를 푸는 도구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 현실에서는 구구단을 외우지 않으면 당장 시험을 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구구단을 외우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진도는 끝났지만 이런 차원에서 아이들과 구구단을 좀 더 공부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