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10월 24일 - 지구에서 만난 귀신

늙은어린왕자 2014. 11. 21. 16:23

[별에서 온 선생님]
지구에서 만난 귀신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중간고사 시험이 끝나고 한 시간 남은 자투리(?) 수업시간, 꼬물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럴 때 요구를 외면하고 공부하자고 하면 녀석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게 뻔하다. 잠깐 속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고 있으니 눈치 빠른 녀석들이 후다닥 교실 전등을 끈다. 또 창가에 앉은 아이들은 재빨리 블라인드를 내린다. 내가 적극 반대하지 않으니 감을 잡은 거다.

"좋다. 이야기 하나 하지. 근데 예전에 내가 무슨 이야기 했더라?"

했던 이야기를 또 하면 안 되는데 나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상태가 이렇다.

"저수지 처녀귀신 이야기요."
"선생님 큰아버지 내 다리 내놔라 귀신요."
"애장터 아기귀신 이야기요."
"엘리베이터 술 취한 아저씨 귀신 이야기요."

역시 이야기를 좋아하는 꼬물이들 머리는 살아있다. 들어보니 내가 늘 준비하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 빠지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다. 빠진 이야기들은 스토리가 길어서 한두 시간으로는 어렵다.

"좋아. 그럼 내가 지구에 왔을 때 처음 만난 귀신 이야기 하나 할께."
"지구에서 귀신도 만났어요?"
"그럼. 내가 살던 별에는 귀신이 없었는데 지구에 오니까 무서운 귀신이 있더라구."
"선생님 별에는 진짜 귀신 없어요?"

꼬물이들 눈빛이 자뭇 진지하다.

"귀신은 영혼이 눈에 보이는 거잖아? 우리 별에도 영혼이 있어. 눈에도 보여. 근데 우리 별 영혼은 모두 천사처럼 예쁜 모습이야. 그래서 우리 별 사람들은 천사귀신을 기다려.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귀신을 보는 게 행운이야. 문제는 너무 가끔 나타나서 탈이지."
"지구 귀신은 무서워요."
"맞아. 밤에 피 흘리며 나타나거나 해골 모습으로 나타나서 무시무시하더라구."

이 쯤 되니 분위기가 확 잡힌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지구에서 처음 본 귀신 이야기를 할께. 내가 지구에 도착해서 어떤 할아버지랑 내기를 했잖아."
"맞아요. 선생님이 이겼잖아요."
"그래. 그 할아버지랑 헤어지고 길을 가는데 그만 날이 저물어버렸어. 캄캄한 밤이 됐는데 잠잘 곳이 있어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할아버지 동네에서 자고 오는 건데 말야. 할 수 없이 밤길을 걸어갔지. 마을이 나오면 자고 가려고 말야. 근데 아무리 걸어가도 마을이 안 보여. 숲 속에서는 캐캥 캐캥 하며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도 막 들려왔오는 거야. 그래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그 때까지 지구 귀신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슬도 내리고 길도 잘 안 보이니까 위험하잖아. 그래서 어디든지 들어가고 싶었지."

캄캄한 밤, 산길, 동물 울음소리.... 꼬물이들은 어디선가 들음직한 스토리가 나오자 자리를 바짝 당겨앉는다. 몇몇은 앞자리로 와서 친구들 의자에 삐집고 들어가서 앉기도 한다. 공부시간에도 이렇게 집중력이 좋으면 한 해가 수월할텐데...

"얼마쯤 걸었을까? 저 숲 너머로 집이 몇 채 보였어. 겉으로 보기에는 몇 집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 마을로 들어서자 집들이 점점 많이 보여. 자세히 보니까 제법 큰 마을이야. 나는 잘 됐다 싶어서 어떤 집 대문 앞에 섰는데 대문이 꽉 잠겨있네? 이 집도 그렇고 저 집도 그렇고 모두 대문이 잠겨 있는 거야. 게다가 골목에는 사람이 한 명도 안 보여. 그리고 아무 집에도 사람 목소리가 안 들려. 이상하지 않니? 아직 한밤중도 아닌데, 요즘 시계로 치면 밤 여덟 시나 아홉 시 밖에 안 되는데 사람 흔적이 없으니 말야. 이 골목 저골목을 다 둘러봐도 똑같아. 걷다 보니 마을 끝까지 왔어. 근데 거기 가니까 무슨 사람 소리가 살짝 들려.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말야. 그래서 담장을 따라 조금 더 가 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흐흐흑 흐흐흑 어떤 여자가 집 안에서 슬피 울고 있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봐." 


"조금 있으니까 저 쪽 골목에서 남자 둘이 그 집으로 들어가더니 시체를 한 구 짊어지고 나오네? 그리고 애기를 등에 업은 젊은 아주머니가 울면서 뒤따라나와. 아까 슬피 울던 여잖가봐. 곧 남자들과 아주머니가 모두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사라졌어. 시체를 묻으러 가는 건가봐. 이 때 맞은편 집 대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고는 불쌍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거야. 내가 물어봤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야. 노인 말로는 이 집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꼭 한 사람씩은 죽어서 나온대. 저 사람들도 갈데 없어서 들어갔다가 또 저렇게 됐다나? 왜 사람이 죽는지는 자기도 모르겠대. 그리고는 대문을 닫아버렸어."

아이들은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침을 꼴딱 삼키기도 하고 무섭다며 친구 어깨를 감싸기도 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나는 참 궁금했어. 도대체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걸까? 마침 갈 데도 없고 해서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보기로 했어. 부서진 대문을 옆으로 제치고 들어가니까 마당이 완전 풀밭이야. 사람이 오랫동안 안 살았나봐. 지붕도 무너져있고 벽도 여기저기 떨어져있어. 방 안에 들어가서 촛불을 켜놓고 보니까 방바닥도 움푹 꺼져 있고 지붕 무너진 데는 하늘도 보여. 그나마 한귀퉁이에 평평한 바닥이 있어서 그럭저럭 누울만 해. 살짝 눈 감고 안드로메다에 두고 온 식구들도 생각하고 지구에 와서 겪었던 일도 생각하면서 우리 안드로메다 노래 부르며 누워있었지."
"안드로메다 노래는 어떻게 해요?"
"아하, 그걸 모르는구나. 우리는 '푸쉬쉬 쉬푸푹키 푸쉬푹~' 이렇게 불러."
내가 볼을 실룩실룩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려주자 아이들이 웃었다.
"지구에도 이런 비슷한게 있지 않나? 랩인가?"
"비트박스요."
"맞아, 진우가 비트박스를 좀 하던데?"
진우는 요즘 연습하고 있다면서 비트박스 한 구절을 어설프게 흉내내다가 그만두었다.
"하여튼 노래를 하다 보니까 눈이 스르르 감겨. 그리고 조금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덜커덩 덜커덩' 문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거야. 바람도 없는데 말야." (2014.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