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11월 11일 - 황당한 일

늙은어린왕자 2014. 11. 21. 16:26

[교실일기]
황당한 일


"얘들아, 이 책 읽어줄까?"
"네~엣!"
셋째 시간 시작 무렵, 내가 책을 한 권 보여주며 물었더니 아이들은 다짜고짜로 합창부터 했다. 손에 든 책은 지난주에 민채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라며 맡겼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아침에야 살펴보았다. 그림책이긴 한데 글자도 꽤 많은 편이다.
"근데,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말야..."
"그래도 읽어주세요!"
"황당해도 너무 황당해."
"그래도 좋아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책 읽는 것도 이야기 들려주는 것과 같으니 아이들이 마다할 까닭이 있나. 어쨌든 나는 민채가 부탁한 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성의라도 보여주려고 물었는데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듣겠다고 덤비니 안 읽어줄 도리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 때 명신이가 물었다.
"근데 '황당하다'가 뭐에요?"
여태껏 뜻을 알고 대화를 나눈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명신이 표정을 살펴보니 정말 모르는 눈치다.
"진짜 몰라?"
"와~황당하네."
옆에서 몇몇 아이들이 아는 체하며 소리쳤지만 명신이는 눈만 껌뻑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예를 들어야 이해하기 쉬울까?
"황당하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은 일을 말해. 예를 들면 어떤 70살 할머니가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면 무슨 노래를 부를 것 같애?"
"트로트요."
"그렇지. 그래야 자연스럽지. 근데 그 할머니가 갑자기 랩을 하는 거야. 그러면 너무 어색하고 황당하지 않겠니? 이럴 때 황당하다고 하는 거야."
명신이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욱 의욕(!)을 가지고 예를 하나 더 들었다.
"그리고 그저께 우리 반 개구쟁이 남학생 몇 명이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가을열매를 막 던지고 놀았잖아. 그래서 7반하고 8반 복도까지 날아갔잖아? 내가 얼마나 황당했겠니. 그럴 때도 황당하다고 하는 거야."
이 정도면 확실히 황당하다는 뜻을 알겠지 하며 슬쩍 명신이 눈치를 보는데 영은이가 소리쳤다.
"저는 선생님이 외계인이라는 게 더 황당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맞장구 소리가 났다.
"맞아요!"
"저도요!"
아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할머니 얘기만 하고 끝냈으면 자연스럽게 넘어갔으련만 괜히 개구쟁이들을 공격해서 화살이 내게로 돌아오게 만들어버렸으니...
"음~ 좋아좋아. 그럼 책 얘기를 해주지."
나는 얼른 분위기를 수습하고 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2014. 11. 10)

*아이들에겐 재미있었겠지만 아이들에게 소개한 그림책은 확실히 황당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말을 끌고가다가 눈보라를 만났는데 마침 옆에 철 막대기가 있어서 말을 매어놓고 눈 속에 파묻혀 잠 자고 일어났더니 자기는 땅바닥에 있고 말은 성당 십자가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랍니다. 주인공은 높이 쌓인 눈 위를 걷고 있었던 상황인데 날이 풀려 눈이 녹자 자기는 미끄러져 내려오고 말은 줄 때문에 매달린 것이지요. 이렇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주인공이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말에게 물을 먹였더니 등 뒤에서 줄줄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랍니다. 돌아보니 말은 절반이 잘린 채로 두 다리로 서 있었는데 배와 똥꼬가 잘려나갔으니 물이 소화되지 못하고 바로 흘러내렸던 거지요. 주인공은 허리가 잘려나가 두 다리 밖에 없는 말을 타고 왔다는 말인데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좋아합니다. 이 책에는 비교육적인 얘기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주인공은 말이 끌어주는 썰매를 타고가다가 늑대의 공격을 받습니다. 늑대는 말을 죽였고 주인공은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늑대가 썰매를 끌고가더랍니다. 주인공은 이 상황을 슬퍼하지 않고 어차피 말은 병들고 비실비실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요!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을 교사나 부모님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