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11월 13일 - 특허전쟁

늙은어린왕자 2014. 11. 21. 16:26

[교실풍경]
특허전쟁


어제 있었던 일이다. 아침 시간에 끼리끼리 놀던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준현이가 씩씩거리며 진우네 종이장난감 가게로 가서 만들어 놓은 종이카트를 찢어버리자 진우 역시 준현이가 있던 곳에 가서 종이로 만들어 놓은 물건을 찢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가만히 두면 패싸움이라도 붙을 기세였다. 내가 중재에 나섰다.

"쟤들이 우리 물건 베꼈어요."
"자기들이 베껴놓고 뭔 소리야!"
"쟤들이 우리 직원을 발로 찼어요."
"쟤들은 우리 책상을 찼어요."

둘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날을 세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단은 특허(?) 기술 유출 때문이었다. 그저께부터 영은이, 경수, 해수가 종이접기를 해서 비어 있던 칫솔 살균통 안에 차곡차곡 넣어놓고 '종이 장난감 가게'를 열었다. 가게에는 딱지, 가위, 칼(검), 팽이 같은 놀이도구에서부터 개구리, 가오리, 대왕말, 고릴라, 유니콘 같은 동물 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같은 먹을거리도 색종이로 만들어놓고 싼 값에 팔거나 공짜로 나눠주었다. 가게가 잘 되자 '직원'들이 늘어났다. 본희, 재웅, 무성, 경호, 민재, 동혁이가 합류하더니 서진, 준하, 준민, 준현이도 직원으로 들어가 열심히 색종이를 접었다.

이틀 동안 이들을 지켜보던 진우와 명신이는 도은이와 성웅이를 영입하여 같은 가게를 열 생각을 하고 사흘 째 되는 날 똑같은 '종이장난감 가게'를 열었다. 칫솔 살균통 같은 버젓한 진열대는 없었지만 인기 있고 기술 좋은 여학생인 민채까지 영입하자 '회사'가 그럴 듯하게 갖추어졌다.

문제는 이때부터 생겨났다.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생기자 서로 경계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상대편에서 자기 물건과 같은 것을 만든다고 비난하고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차피 우리 책에 있는 게 저기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베꼈다는 거에요!"

늦게 사업에 뛰어든 진우네 직원들이 항변했지만 상대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딱 자르면서 말했다.

"물건은 비슷해지기 마련이니까 서비스 경쟁을 하는 게 어때? 이제부터 서로 비난하면 영업을 그만두게 할 거야."

양쪽은 씩씩거리면서도 곧 서비스 경쟁에 들어갔다. 그리고 손님모시기 활동을 시작했다.

"공짜권입니다. 우리 가게로 오세요!"
"1+2(원 플러스 투) 할인권도 있어요!"

상대편도 이에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무료이용권 많아요. 우리 가게로 오세요."
"1+3 할인권도 있어요!"

돌아가는 모양새가 가관이었다. 직원들을 빼고 나면 소비자는 몇 되지도 않거니와 소비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접은 색종이에 관심이 적었다. 그러니 손님은 없고 호객꾼 목소리만 교실에 가득찼다. 나중에는 서로 '공짜'를 외치더니 소비자도 아닌 나한테도 할인권, 공짜권이 막 날아왔다.

서비스 경쟁이 잠잠해질 무렵 또 사건이 일어났다. 성웅이, 재웅이 두 웅이가 한 판 붙은 것이다.(정말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반이다!) 진우네 직원인 성웅이가 영은이네 직원들에게 '재웅이 해고시켜라'고 권했다는 소리를 듣자 재웅이가 발끈한 것이다. 주먹이 왔다갔다 하던 싸움은 영은이가 '재웅이 해고할 마음이 없다'고 하자 진정되었다.

이 모든 일의 뿌리는 바로 지난주에 내가 내린 '계엄령' 때문이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던가, 금요일이었던가? 민재가 햄스터 상자를 들고 온 날이다. 점심을 먹고 연구실에 갔다가 교실로 올라오니 우리 반 복도는 물론이고 7반, 8반 복도에까지 통합 시간에 만들어놓은 가을열매가 날아와 있었다. 개구쟁이 몇몇이 던지고 놀았던 것이었다. 또 칠판 밑에는 햄스터를 꺼내어 놀았는지 톱밥이 흩날리고 있고, 쓰레기통 주위에는 몇몇 아이들이 먹은 과자봉지, 사탕껍데기가 어지럽게 늘려있었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남자 아이들 몇몇은 교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레고에 빠져있었다.

다음 주에 학예회가 있어서 안 그래도 어수선한데 도저히 이대로 두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나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앞으로 특별한 말이 있을 때까지 레고, 동물, 과자를 들고 오지 못한다며 세 가지를 금지시키고, 아침시간과 점심시간에도 놀이하지 말고 책 보거나 앉아있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하루 정도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은이가 종이딱지를 보여주며 "이런 거 만들어서 놀면 안 돼요?" 하고 물어서 "된다"고 했던 게 월요일이니 이 때부터 '종이 장난감 가게'놀이가 시작되었고, 어제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녀석들은 어떻게 통제해도 솟아나는 구멍을 찾아낸다.

오늘 보니 영은이네 종이 장난감 가게는 '성업' 중이다. 그런데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었던 진우네 가게는 잠잠한가 싶더니 폐업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왕 시작한 김에 좀 오래가면 좋았을 텐데 이 점은 좀 아쉽다.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