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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글쓰기 교실 (2)

늙은어린왕자 2014. 12. 24. 19:39

우리 집 글쓰기교실(2)

 

    

 

두 딸과 시작한 우리 집 글쓰기교실은 첫 두 달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마 처음 할 때 가졌던 호기심이나 설렘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공부를 몇 번 해보니 딸들이 글쓰기공책과 마주하려면 험난한 고비를 몇 번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고비는 바로 학원공부이다. 사실 두 딸은 지난해까지 공부에 관련된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큰 딸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작은 딸은 5학년이 될 때까지 피아노, 검도 같은 예체능 학원만 다녔을 뿐이다. 이들 학원은 음악공부, 무예 공부에 깊이 파고들 목적보다는 엄마, 아빠 없는 오후 시간을 안전하게 보낼 방편으로 보냈으므로 저녁 시간을 침범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올 3월부터 중학생인 큰 딸은 수학, 영어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작은 딸은 영어 방문학습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주중에 차분하게 글 쓸 시간이 없었다.

둘째 고비는 TV. , 일요일 낮에는 시간이 비는 듯하지만 학원 공부 보충, 음악대회 준비, 친구들 만나기, 식구들 나들이 같은 일정으로 바쁘다. 결국 글쓰기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늦은 오후나 밤에 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TV를 뛰어넘어야 한다.

'평일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TV를 보지 않고, 일주일에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섯 가지 이내'라는 규칙에 따라 딸들은 볼 프로그램을 토요일, 일요일 오후~저녁 시간대에 집중 배치해놓았다. 프로그램에는 '~스타', '~', '~어디가' 처럼 초저녁에 하는 것도 있지만 주말드라마처럼 11시가 되어서야 끝나는 것도 있다. 프로그램이 비는 저녁 8시에서 10시까지 시간을 놓치면 글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세 번째 고비는 휴대전화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아이들은 전화기를 만진다. 큰 딸도 그렇고 작은 딸도 그렇고 예전에는 시간 날 때 곧잘 책을 읽더니 요즘은 틈만 나면 '전화질'이다. 그 시간에 책 한 줄 읽거나 글 한 자라도 쓰면 좋으련만 이러쿵저러쿵 입을 대면 간섭한다, 잔소리 한다며 반발심만 키울까봐 적당히 말하고 만다. 어쨌든 휴대전화는 글쓰기 공부에 큰 장애물이다.

물론 이런 고비들이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글쓰기를 아주 못하게 할 만큼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누려야 할 사생활이 있으니 서로 타협하며 시간이나 마음을 조절해가려고 한다.

 

글쓰기 절차

지금까지 글쓰기를 소홀히 했던 까닭일까? 두 달 정도 지켜보니 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글감잡기였다. 늘 묻는 얘기가 아빠, 뭘 쓸까요?’, ‘쓸 게 없어요.’이다. 그래서 글쓰기 이틀 전에 잠깐이라도 글감에 관해 미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쓴 글을 문집으로 엮으려면 글을 다듬고 컴퓨터로 입력하는 절차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마다 할 일을 요일별로 정했다.

 

1. 목요일 : 글감 찾기

글쓰기 이틀 전에 글감을 정했는지 확인한다. 글감을 정했다면 쓸만한 주제인지 이야기 나눈다. 글감이 없으면 남은 이틀 동안 글감을 준비한다.

 

2. 토요일 : 글 뼈대잡기, 글쓰기

준비한 글감을 주제로 글의 흐름을 잡는다. 글 흐름에 맞게 쓴다.

 

3. 일요일 : 고쳐 쓰기, 메모장에 입력하기

쓴 글을 살펴보며 글 내용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 잘된 점, 부족한 점 등을 살펴본다. 고칠 곳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한 곳은 덧붙인다. 완성한 글을 전화기 또는 컴퓨터로 입력한다. 이 일은 내가 맡는다.

 

집에서 하는 글쓰기 공부에 무슨 형식이 필요하랴 싶지만 사실 우리 식구는 마주 앉아 이야기 한 토막 나누기 힘들 만큼 각자 생활이 바쁘다. 글감을 놓고 잠깐 이야기라도 나누고, 주마다 한 편이라도 글을 건지려면 조금이나마 구속력 있는 이런 형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 쓰기

지난달에 글공부를 소홀히 했던 작은딸은 4월 들어서는 제 나이 아이들답게 글을 썼다. 47일에는 '라면 끓이기'라는 주제로 겪었던 일을 써 놓았다. 327일 날 학교에 내는 일기장에 썼던 글인데 다른 주제 보다 마음에 든다며 조금 손질해서 내놓은 것이다.

 

<라면 끓이기>

오늘 저녁에 라면을 먹었다. 엄마, 아빠께서 약속이 있으셔서 조금 늦게 오신다고 해서 언니와 나만 먹었다. 언니랑 나는 각자의 냄비에 라면을 끓여 따로 먹었다. 나는 라면을 별로 안 끓여봐서 라면을 어떻게 끓이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일단 물을 조금 붓고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야, 물 이만큼 붓는 거 맞아?"

"아니다. 조금 더 부어야 된다."

라면을 많이 끓여본 언니의 말에 나는 물을 조금 더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물은 한 4분 정도 있으니까 서서히 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이 보글보글 하더니 나중에는 큰 물방울들이 엄청 빨리 뽀글뽀글하면서 끓었다.

나는 이 때 건더기 스프를 넣었다. 그리고 이어서 분말스프를 넣었다. 분말스프를 넣을 때 뽀글뽀글 하던 물이 갑자기 위로 부풀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혹시 넘칠까봐 걱정도 됐다.

크게 부풀어 오르던 거품이 잠잠해지자 나는 면을 두 개로 부숴서 끓는 물에 넣었다. 이렇게 한 6~8분을 있으니 라면이 흐물흐물해졌다. 혹시 라면이 불까봐 불을 얼른 껐다.

식탁에 행주를 깔고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먹었다. 라면은 참 맛있었다. 오늘 라면을 직접 끓여보니 나는 라면을 끓이는 데 소질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라면을 잘 끓일 자신이 생겼다. (47일 일요일 바람이 쌩쌩 불었다.)

 

대개 초등학생들의 일기장을 보면 이런 글이 많다. 일상에서 겪는 작은 소재를 가지고 평범하게 써내려간 이런 글을 어떻게 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평소에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많이 쓰게 한다. 남에게 공개하는 글쓰기라고 해서 뭔가 큰일을 쓰기 보다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이런 작은 일들을 스케치하듯 자주 쓰는 것이 글 쓰는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일상에 눈을 돌리는 습관이 생겨야 그 중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나 생각을 골라내는 힘도 기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 나중에 내용 면에서 한 단계 성숙한 글쓰기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작은딸에게는 앞으로도 이런 글을 많이 쓰라고 했다.

 

의심 소동

412일에 작은딸과 나는 새로 쓸 글감을 찾으려고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 : 글감 있니?

나라 : 아니.

아빠 : 하나도 없어?

나라 : .

아빠 : 이 정도면 얘기해도 되겠다 싶은 일 없을까?

나라 : . 아까 점심시간에 계단에서 장난치려고 도연이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데 도연이가 넘어져서 손목을 다쳤어요. 병원 갔는데 깁스 했다고 해요.

아빠 : 안타깝네. 그래서 도연이한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는 거야?

나라 : 거의 저 때문이에요. 도연이가 계단에서 뒤돌아보다가 발을 헛디뎠거든요.

아빠 : 그래가지고 도연이한테 어떻게 했니?

나라 : 카톡으로 미안하다고 했어요.

아빠 : 도연이가 답을 했니?

나라 : '헤헤'라고 왔어요.

아빠 : 지금 심정은?

나라 : 조금 미안해요.

 

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고, 이것을 글감으로 잡아서 써보라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딸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성의 없이 대답하는 데다 다친 친구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욕심을 부렸다.

 

아빠 : 글을 쓰기 위해서 그러면 안 되지만 아니, 글을 쓰지 않더라도 도연이한테 걱정해주는 말을 직접 한 번 더 해주면 어떻겠니? 카톡만 하고 끝내지 말고. 만약 이걸로 쓰려면 그러고 난 뒤에 글쓰기를 해봐. 도연이한테 미안하다고 한 내용도 쓰고 도연이 반응도 쓰고. 글쓰기는 삶을 쓰는 거야. 니가 진짜 도연이를 걱정한다면 그런 삶을 보태서 글을 써야 나같이 읽는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지 않을까? 독자는 삶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니까.

 

내가 꼬치꼬치 따지듯 질문하는 것도 못마땅한데다 삶을 강요하는 듯한 말을 하자 작은딸이 화가 났다.

 

나라 : 글 쓰려고 꼭 그렇게 해야 되요?

아빠 : 아니, 그건 선택이야. 그러나 글을 쓰지 않더라도 친구의 도리로 그렇게 해주는 것이 보기 좋지 않겠니?

나라 : 그렇게 하더라도 글에는 안 넣을 거예요.

아빠 : 하여튼 그건 너의 마음에 달렸다. 그래도 친구한테 도리는 다해야 하지 않겠니?

나라 : 내일 아침에 만나면 하죠.

 

작은딸은 퉁명한 목소리로 답하더니 입을 닫아버렸다. 이 때 언니가 끼어들어 불을 붙였다.

 

어진 : 나라는 별로 미안한 마음이 없는 듯해요.

아빠 : 어쨌든 이 글감을 글로 쓰려면 좀 더 삶을 덧붙이는 좋겠어. 도연이가 다쳤다는 내용까지만 쓰면 독자한테 다가가지 못할 것 같아. 이 글감으로 글을 쓰든 안 쓰든 그건 너의 마음이야. 내일 모레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더 좋은 글감이 있으면 생각해봐.

나라 : …….

 

다음 날, 여태껏 써 놓은 글을 컴퓨터로 입력하려고 작은딸 글쓰기공책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도, 방에도, 종이 재활용 통에도 없었다. 혹시 딸이 어제 나와 이야기 나누다 감정이 상해서 공책을 숨기거나 버린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 : 나라야, 혹시 공책 버렸니?

나라 : 아빠, 지금 의심하는 거예요? 내가 왜 공책을 버려요. !

 

딸은 정말 화가 났다. 분위기로 봐서는 이 주에는 글쓰기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밤에 공책이 엄마 가방에서 나왔고, 나는 딸에게 사과했다. 마음이 풀린 딸은 결국 '아빠의 의심'을 글감으로 글을 썼다.

 

<아빠의 의심>

이틀 전이었다. 아빠가 내 글쓰기 공책이 없어져서 막 찾았다. 그래서 나도 찾다가 아무리 봐도 없기에 그만 찾고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근데 아빠가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나라야, 니 혹시 글쓰기공책 학교에 가져가서 책상 서랍에 둔 거 아니가?"

"아니거든요."

", 어제 아빠랑 언니가 그런 말해서 화나서 그런 거 아냐?"

", 진짜 아니거든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언니와 아빠가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을 했어도 나는 그런 걸 갖고 공책을 숨길 정도로 쩨쩨한 아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의심하는 아빠한테 화가 났다.

다음 날 저녁에 아빠는 글쓰기 공책을 무슨 가방에서 찾았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나에게 의심을 풀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누가, 왜 여기다가 공책을 넣어놓았지?"

나는 너무 짜증났다. 그 때, 엄마가 말했다.

"? 나라 글쓰기 공책? 그거 내가 가져가서 반 아이들에게 보여줬는데?"

나는 진짜로 너무 짜증났다.

",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빠는 몰랐지."

나는 화를 참았다. 그리고 어차피 금방 잊어버리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 사이에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414)

 

나는 다시 한 번 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쓴 글 가운데 가장 진심이 들어간 글이라는 칭찬도 해주었다. 의심 소동은 이렇게 끝났다. 어설프게 삶을 강요하면 껄끄러운 일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 소동이었다.

 

글쓰기 대회

과학경진대회가 한창이던 4월 초,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큰 딸이 학교에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종류는 과학 글쓰기라고 했다.

"뭘 쓸까요?"

"그렇게 막연하게 물으면 어떡해. 어제쯤 미리 말했으면 준비했을 텐데 지금 이야기하니까 너무 막막하잖아."

"그러게요."

그래도 여러 가지 행사 종목 가운데 글쓰기를 선택한 점이 특이했다. 예전에는 주로 그림 종목에 참가했다.

"여러 종목 중에 글쓰기를 선택한 이유가 있니?"

"그냥요."

"그냥이 어딨니? 요즘 집에서 글쓰기 공부한다고 택한 거야?"

"."

우리는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주제가 뭐야? 과학의 발전? 아니면 생명이나 환경?"

"그건 아직 모르겠는데요."

"어떤 게 나오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아. 처음부터 과학의 발전이 어떻고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둥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심사하시는 분들에게 다가가지 못할 것 같지 않니?"

"그야 그렇죠."

"그래서 너가 경험한 생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어. 우리 이번에 집에서 표고버섯 기른 것도 좋은 예잖아? 과학원리도 들어있겠다, 환경도 생각하는 사례잖아. 또 뭐가 있겠니?"

"아빠가 별 보고 사진 찍고 하는 거?"

"그렇지. 먼저 그런 예를 한두 가지 들면서 시작하면 좋겠어. 그런 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니까 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잖아. 이런 사례가 없다면 TV나 신문에서 보았던 것을 끄집어낼 수도 있어. 이렇게 시작하고 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시간이 없어서 이 정도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 날 저녁에 물어보니 딸은 아침에 이야기 나눈 것을 참고해서 열심히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상 받을 만한 글은 안 됐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인 5월 초, 큰딸은 또 학교에서 글쓰기대회를 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수필대회였다. 딸 말로는 집에서 글쓰기를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스스로 참가하겠다고 했단다.

글감잡기도 어려워하는 녀석이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스스로 하겠다니 열심히 써보라고 했다.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면 그 주제와 잘 어울리는 경험을 소개하고, 그래도 막힌다면 엄마나 친한 친구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보라며 도움말도 해주었다.

이 날 오후에 딸이 호들갑을 떨면서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수필대회에서 쓴 글인데 쓴 분량도 많고 내용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읽어보고 평을 날려달라고 했다.

서너 가지 주제 가운데 딸이 선택한 것은 게으름이었다. 글을 살펴보니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흔적이 엿보였다.

 

<게으름은 공부의 적>

내가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폰 만지기이다. 폰을 20~30분쯤 만지고 있으면 엄마가 오셔서 잔소리를 늘어놓으신다.

"이어진! 학원 끝났다고 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얼른 씻고 예습해."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조금만 더요."

어떤 날에는 학원 갔다 와서 쉰다는 핑계로 결국 한 시간 이상 폰을 들고 있기도 한다. 그럼 엄마도 폭발해서 화를 내시곤 한다.

이런 잔소리를 엄마만 하겠는가? 물론 아빠도 하신다. 아빠께서 집에 들어오시면 가장 먼저 하는 말씀이

"어진, 나라 얼른 양말 벗고 씻어."

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곧장 양말과 스타킹을 벗어던지고 아빠를 맞이한다.

요즘은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하는 말씀은

"글쓰기 주제 정했니?"

가 먼저다. 글쓰기 주제는 동생과 내가 일주일마다 한 편씩 글을 쓰는데 이 때 그 주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누구보다 게으른 아이를 싫어하는 아빠께서는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만약에 TV를 보거나 친구와 논다는 등의 핑계를 대서 글을 못 썼다고 하면 아빠는 12시가 넘어서도 글쓰기를 하도록 하신다.

이렇듯 우리 아빠는 게으른 것을 절대 참지 못하신다. 오죽하면 동생이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게을러지지 말자'라는 말을 하셨을까. 그렇지만 난 아빠가 아니었으면 초등학생 때 게을렀던 성격이 고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줄임)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적도 오르고 수업에도 자신감이 생겼다는 이야기인데, 아침에 경험을 강조한 탓인지 글 앞뒤에 무려 세 가지나 넣어놓았다.

글쓰기가 어렵다며 여태껏 이런 대회에 거의 참가하지 못하던 딸이 스스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렇고, 억지로 짜내듯 쓰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도 좋아서 애 썼다고 칭찬문자를 보냈다. 대회를 주관한 선생님들이 잘 봐준 덕분인지 이번 글은 장려상을 받아왔다.

 

위기의 5

문제는 이 다음에 찾아왔다. 수필 대회 이후 큰 딸 공책은 늘 텅 비어있었다. 수필 대회를 할 때는 학교에서 글(수필)을 썼으니까 한 주 봐달라고 해서 넘어갔는데 그 다음 주에는 바쁘다며, 그 다음주에는 미루다가 글을 쓰지 않았다. 수필에는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고 맹세를 해놓고 생활은 완전히 딴 판이 된 것이다. 그러니 결국 수필은 머리로만 쓴 글이 된 셈이다.

5월 마지막 주에 이르자 도저히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글쓰기를 재촉했더니 이번에는 전화기로 바로 입력해놓겠다며 또 옆길로 빠질 준비를 했다. 딸은 제법 썼다며 전화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때 문제가 생겼다. 쓴 글을 저장하다가 버튼을 잘못 눌러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나는 그런 태도로는 아무 일도 못한다며 딸을 야단쳤다. 딸은 눈물을 흘리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 딸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을 즈음 우리는 십여 분 정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 : 처음부터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자. 니가 요즘 감정이 뭐 어떻다고?

어진 :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아빠 : 예를 들어보자.

어진 : 아빠가 혼낼 때

아빠 : 어떤 생각이 들어?

어진 : 처음에 아빠한테 화났는데.

아빠 : 화가 막 난다? 화날 때는 그럼 아빠한테 어떤 생각이 드는데?

어진 : 막 울고 싶고

아빠 : 아빠가 미워지기도 하나?

어진 : .

아빠 : 아빠를 때리고 싶나?

어진 : 아니. 그냥 화가 나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그랬는데

아빠 : 뭐든지 하기 싫나?

어진 : . 근데 내가 음악을 듣거나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아빠 : 그럼 니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푼단 말이야?

어진 : 응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아빠 : 너 만의 시간을 가진단 말야.

어진 : 근데 꼭 내 혼자여야 돼.

아빠 : 아무래도 니가 사춘기 경향이 있는 거 같아. 근데 아빠가 너한테 언제 나무라든?

어진 : 어제.

아빠 : 어제?

어진 : .

아빠 : 자세히 얘기해봐.

어진 : 어제 내가 핸드폰으로 글 쓰고 있었는데, 왜 내가 핸드폰으로 글 쓰고 있었냐면 내가 감기몸살에 걸려서 손이 안 움직이더라구.

아빠 : 너 그 얘기 안 했잖아.

어진 : 아빠가 핑계라 생각할까봐 얘기 안 했지.

아빠 : 이유를 얘기했으면 내가 야단 칠 일도 아닌데.

어진 : 우성이 삼촌 집에서 가위질 했잖아. 그 때 힘이 너무 많이 들어서 TV볼 때 손이 덜덜 떨렸단 말야. 그 때 후유증이 아직 남은 거 같아서 내가 요즘엔 연필을 잘 안 잡거든.

아빠 : 근데 내가 너한테 뭐라 한 건 딴 일 하면서 쓰지 말고 휴대폰으로 쓰더라도 집중해서 쓰란 말이잖아.

어진 : 아무 것도 안 하고 진짜 집중해서 썼는데 복사하다가 날아가니까 나도 허무하고 억울했는데

아빠 : 그럼, 그 때 내가 너한테 뭐라 한 건 잘못한 일이야.

어진 : 그래.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아빠는 내가 아픈 것도 모르고 화를 내고, 내가 글을 잘 쓰고 있었는데 삭제되니까 아빠가 화를 내니까 나도 억울하고 화나고 아빠가 미웠는데 그래서 방 안에 들어갔잖아. 거실에 있으면 사람이 많으니까. 들어가니까 나라가 지 알아서 나가데? 내가 우는 거 보고. 그래서 내가 귀마개로 귀를 막고 휴지 두 장으로 코를 풀고 눈물 닦으며 글을 썼는데 아빠한테 너무 화가 나고 있었는데 그 때 글을 쓰고 있으니까 조금 화가 풀리더라구.

아빠 : 너 보통 화 나면 음악 듣고

어진 : 울어.

아빠 : 혼자만의 시간 가진다는 게 글 쓰는 것도 혼자만의 시간이네 그럼.

어진 : .

아빠 : 그래서 화가 풀렸네?

어진 : 내가 우니까 글씨가 갑자기 좋아지더라.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아졌어.

아빠 : 원래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감정이 해소가 된대.

어진 : 내가 요즘 점점 더 눈물이 많아진 거 같애. 하품할 때 눈이 너무 아파.

아빠 : 하품하고는 좀 다른데?

어진 : 아니, 하품할 때 눈물이 나는 게 아니고 눈이 아파. 병원에 가야 될 정도로.

아빠 : 근데 어쨌든 어진아. 너가 글 날렸을 때 야단친 건 내가 너무 과했고, 화나는 상황에서 니가 음악 듣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화를 푼다고 했잖아. 나는 그 부분이 참 대단한 거 같애. 왜냐하면 니가 반항하지 않고 크게 빗나가지 않고 그렇게 푼다니까 아빠는 기분이 좋아.

어진 : 그렇지?

아빠 : 니가 좀 성숙한 거 같아. 그런 거 보면.

어진 : 애들도 그래.

아빠 : 어쨌든 그런 부분은 참 좋고. 근데 아빠도 어제 화낼 상황이었잖아. 그건 너도 이해하잖아. 한 달 정도 니가 글쓰기를 비웠기 때문에 아빠는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 아이 같으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잘 못한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니가 계속 미루는 걸 봤거든?

어진 : .

아빠 : 이번에는 이거 한다고 못하고 또 어디 간다고 늦었다고 못하고 그러다가 벌써 한 달이 되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누가 아빠가 되더라도 야단쳤을 것 같애. 그 야단을 니가 어느 정도 감수를 했나?

어진 : 아니, 못해서 내가 화를 냈잖아. 울었잖아. 화를 못 참아서 울었잖아.

아빠 : 울고 나니까 감수가 되더나?

어진 : 많이 울었어.

아빠 : 아빠 생각도 이해가 되더나?

어진 : 근데 내가 어제 너무 울어가지고 오늘 아침에 눈이 퉁퉁 불어가지고 쌍커플이 엄청 많이 생겼는데, 학교에서 1교시 동안 눈 감고, 그래서 눈 마사지를 해줬는데 2교시 때 딱 풀렸어. 근데 국어샘이 내가 눈 감고 있으니까 명상하고 있다고 해서 아이들이 내보고 모두 웃었어. 나도 웃었는데 눈 마사지 했더니 풀렸어.

아빠 : 누가 마사지 해줬는데?

어진 : 내가.

아빠 : , 부은 게 풀렸다고?

어진 : . 어제 너무 많이 울어가지고. 근데 라면도 먹었어.

아빠 : 하하. 내가 보기에 라면이 주 원인 같은데.

어진 : 아니.

아빠 : 근데 어진아 봐라. 너 아빠한테 말을 해라 하면 말을 재미있게 잘 풀어놓잖아. 요즘 니가 감정기복이 심했다고, 아빠한테 야단 맞으면 감정기복이 심하다고 했잖아? 그 얘기 그대로 글로 쓰고, 아빠하고 어제 있었던 일 있잖아. 그 상황을 예로 들면서 니 억울한 점도 쓰고. 니가 막 울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글 쓰고 나니까 감정이 풀리더라, 근데 문제는 풀렸는데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까 눈이 퉁퉁 부어있더라는 얘기 모두 좋아.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있었던 얘기도 참 재밌네. 그러니까 그런 내용을 글로 쓰면 되잖아.

어진 : 내가 눈이 아파서 요러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 어진이 지금 명상한다." 이렇게 해가지고 애들이 다 웃었는데.

아빠 : 그래. 그런 것도 글감이 될 수 있어. 근데 어진아. 사람들이 화나고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 눈물이 나도 해소가 되는데, 그 감정을 그대로 글로 쓰면서 해소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대. 니가 어제 맺혔던 감정 그리고 그걸로 인해서 있었던 일 같은 거 글감으로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그런 걸 듣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니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잖아.

어진 : ?

아빠 : 너는 그 감정을 글로 쓰면서 해소가 되잖아. 카타르시스. 그러면 너한테 좋제? 그 다음에 아빠가 읽어보면 얘 정말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썼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으니까 좋지.

어진 : 근데 그 글을 만약에 내가 잘 쓰면 아빠 나한테 혼내지 마.

아빠 : 절대 혼 안 내지. 그런 거 가지고는. 내가 글 내용가지고 니가 이렇게 생각 했니, 저렇게 생각 했니 하면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어진 : 근데 그 글 잘 쓰면 민들레선생님*한테 보여줘?

아빠 : 그렇지. 선생님도 그런 얘길 듣고 싶어 하지 니가 수련회 가려고 아침에 차 기다린 이야기, 가서 체력단련 한 이야기 이런 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

어진 : 근데 이런 거 쓰도 돼요?

아빠 : 어떤 거?

어진 : 나는 자유시간을 갖고 싶다.

아빠 : 좋지. 어진아. 아빠가 듣고 싶은 게 바로 그런 거야.

어진 : 역시 나는 똑똑해.

아빠 : 글감을 잡을 때 항상 니가 쓰고 싶은 마음 있잖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런 걸 쓰라고.

어진 : .

아빠 : 그리고 니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겪었던 상황을 제시해야 되잖아. 그럼 그걸 그대로 써. 방금 아빠한테 얘기했잖아? 그런 걸 그대로 글로 써.

어진 : 어진이는 이번 주에 글쓰기가 밀린 게 아니라 글감이 밀렸어.

아빠 : 사실 글감을 못 찾은 거지.

어진 : 그렇지.

아빠 : 막연하게 어렵게 생각하고.

어진 : 맞아.

아빠 : 근데 저번에 너 수필 썼잖아. 길게 열심히 쓴 건 알겠고 잘 썼어. 칭찬해주께. 근데 조금 체계가 떨어져. 평소에 너 중심으로 자꾸 쓰다보면 내공이 쌓여. 그러면 수필처럼 긴 글 쓸 때도 거리낌이 없어져. 일단 편하게 너 생각 위주로 써봐. 중요한 건 잘 쓰는 게 아니고 너 생각대로 글 쓰는 연습을 자꾸 해야 돼. 그게 쌓여야 돼. 6개월 정도만 그렇게 써봐.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주제를 잡더라도 글 쓰는 데 두려움이 없어질 거야.

어진 : 진짜? 안 그러면 아빠 혼 낼 거야?

아빠 : 왜 혼내겠니?

(*민들레선생님=백영현 선생님. 울산에서 가족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 우리 집 글쓰기교실에 관심이 많고, 독서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딸들을 격려해주신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딸이 글쓰기를 소홀히 한 까닭에는 글감 문제가 어느 정도 들어있었다. 3월에는 호기심이 힘을 내어 글쓰기를 하게 했고, 4~5월 초까지는 막연한 자신감이 작용하여 학교 글쓰기대회에 참여하게 했지만, 호기심도 사그라지고 자신감도 힘을 잃은 5월에는 무엇을 써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큰 딸의 공책이 다시 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글은 동생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대견스러운 내 하나뿐인 동생>

나는 이번 주 금요일에 하는 파자마 파티를 위해 더러운 내 방을 청소하기로 하였다. 서랍에서 버릴 건 버리고 차곡차곡 정리하다보니 어느 새 서랍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애들이 동생 서랍도 볼까봐 어지러운 동생 서랍도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책상 밑에까지 말끔히 청소를 하고 동생 서랍을 여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서랍에는 내가 예전에 쓰던 물건들이 서랍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첩도 내가 쓰다가 동생한테 준 것들 밖에 없었고 새 물건은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니 옷들도 예전에 내가 입었던 것들이나 내가 입는 것들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자기 옷은 3~4벌 정도 될까? 신발도 내가 신던 걸 신었고, 필통도 내가 새로 살 때마다 준 안 쓰는 것(헌 것)들 밖에 없었다. 항상 TV나 만화책을 봐도 언니나 형들만 새거, 동생들은 헌 물건만을 사용했었다.

예전엔 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성숙해지고 나서는 약간씩 동생한테 미안한 구석이 있었다. 근데 더 슬픈 건 동생은 그런 것들도 항상 불평 없이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초딩 때 안 쓰는 수첩을 줄 때, 필통을 줄 때 등 동생은 그것도 좋아라 하며 절대 새 것을 달라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잠깐 밖에 나갈 일이 생겼는데 동생이 내 옷을 한 번만 빌려달라고 해서 난 싫다고 대답하였다. 결국 엄마의 말을 듣고 빌려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미안했다. 얼마나 내 옷이 입고 싶었을까. 항상 헌 옷만 입는데도 불평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동생한테 옷을 많이 빌려줄 것이고 또 신발도 많이 빌려줄 것이다. 물건은 헌 게 아니라 새 것을 줄 것이고 수첩도 사줄 것이다. '동생'이라는 말 때문에 항상 헌 것을 가져도 불평하지 않는 내 동생이 너무 대견스럽고 기특했다. (62)

 

아주 우연한 기회에 보고 느낀 점을 잘 잡아 썼다. 사실 나도 동생이 언니 쓰는 물건이나 옷을 물려 입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세밀하게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물려주고 받는 관계다보니 더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 덕분에 나도 작은딸을 좀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공책에 나라가 불평 없이 언니 헌 물건을 쓰는 것도 고맙지만 어진이가 동생의 그런 점을 발견하고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도 참 고맙네. 앞으로 좋은 자매 관계가 되길 기대한다. 이번 글에는 너의 진심이 보여. 그래서 읽기가 편하고 느낌이 참 좋아.’라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동생한테는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부탁해서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 이 글이 회보에 실리면 그 때 동생이 보게 될 듯하다. 동생의 반응이 궁금하다.

두 번째 글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썼다. 보여주기 전에 이번 글은 짧게 썼다며 야단치지 말라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은근히 자신 있어 하는 표정이 엿보였던 글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람들은 예전부터 사춘기가 되면 성격이 까칠해지거나 반항심이 생긴다고들 한다. 근데 나에겐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반항심이 생기는 것은 맞는데 까칠해진다는 점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사춘기가 되고 나서는 까칠하기보다 오히려 더 밝아진 것 같다. 그래서 저번에 엄마한테 말씀드려 보았다.

"엄마, 내가 사춘기가 되니까 더 밝아진 것 같지 않나요?"

", 엄마는 그게 더 좋아. 예전에는 냉정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밝잖아?"

"그게 더 좋지요. 히히 귀엽죠?"

", 귀여워."

우리 엄마는 내가 쭉 사춘기였으면 하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난 내 성격이 밝아진 건 좋은데 감정기복이 심한 것이 너무 싫다. 감정기복 때문에 내가 하루에 몇 십 개의 기분을 경험하는지 모른다. 아침 땐 막 밝다가 학교 가선 좀 조용하고 또 쉬는 시간 땐 시끄럽고 학원 갔다 오면 우울하고 괜히 화나고.

예전엔 감정기복이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너무 심해졌다. 난 혹시 때에 맞지 않게 기분이 변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감정조절을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얼른 이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610)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더니 위기를 겪었던 5월이 지나고 연속 2안타를 친 느낌이라고 할까? 글을 보니 은근히 자신감을 내보인 까닭이 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툭 내뱉듯 경쾌하게 잘 나타냈다. 나도 기분 좋게 댓글을 달았다.

 

요즘 너의 생각을 짧지만 인상 깊게 잘 쓴 것 같구나. 내가 봐도 너는 요즘 감정이 너무 하늘과 땅으로 왔다 갔다 해서 사실 조금은 말 붙이기가 조심스럽기도 해. 하지만 넌 밝을 때가 훨씬 많아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해서 전혀 걱정이 안 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생활하면 좋겠고, 인생에서 이런 순간은 단 한 번뿐이니까 그런 감정도 충분히 느끼고 또 즐기면 좋겠어. 글이 짧다고 걱정했는데 내가 보기엔 할 말이 거의 다 들어있어서 분량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여.’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