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어린왕자 2014. 12. 24. 21:05

내 마음이 허전할 때면 찾는 곳이 가까운 서점이다. 한적한 찻집이나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책을 접하면서 상념을 잊는 것도 좋은 방편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이리 저리 둘러보는 것이 재미있다. 제일 먼저 가는 곳은 어린이 코너이다. 대개 어린이 코너에 가서 새 책이 나왔나를 살피는 것은 내 직업 탓일 것이다. 김해의 자그마한 서점들은 대개 어린이 책들과 교육에 관한 책들을 같이 두는데 이것도 어린이 코너를 먼저 들르게 만드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따끈 따끈한 신간들이 널려 있는 코너이다. 세상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작은 몸놀림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지는 않는다. 흥미 있는 제목이 눈에 띄면 내용이라도 간단히 훑어보지만 그냥 제목과 지은이의 이름만 주마간산 식으로 보고 발길을 돌린다.

인문 사회과학 분야도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우리말과 역사, 사회변동, 국제관계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학 코너에 가서 천문우주관련 책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고, 컴퓨터 분야의 기능이나 이론서에도 자주 손이 간다. 그 밖에 바둑과 역법 같은 잡다한 취미에 관련된 책들이 있는 곳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다.

이렇게 여러 곳을 둘러보다 보면 한 시간은 그냥 간다. 때때로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있을 때 그 내용에 빠지면 두 시간도 훌쩍 넘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울적한 마음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리 속이 시원하게 맑아진다.

물론 서점이나 작가에 대해 그 댓가는 충분히 지불한다. 울적해서 갔든지 우연히 갔든지 상관 없이 책방에 들어갔다가 빈 손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 보면 마음에 드는 책이 손에 잡히게 되고 반드시 집으로 가져가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 때문에 생긴 '사건'이 있었다.

보름 전쯤 내외동에 새로 생긴 서점에 갔던 적이 있다. 시내에 있다가 크게 넓혀 옮긴지 얼마 안된 서점이었다. 내외동에는 갈만한 마땅한 서점이 없던 터라 속으로는 무척 반갑기도 했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자주 가는 곳이다.

그 날은 다른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갔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30분 쯤 시간을 보내리라 예상하고 들어갔지만 책을 고르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음에 드는 책 하나만 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관련된 책을 자세히 비교하면서 살펴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썩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책을 보고 있는데 셔터 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나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마음이 공허해서 온 것도 아니고 원하는 책을 사러 왔기 때문에 얼른 고르고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책 저 책 손놀림을 빨리 하면서 보았다. 그런데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줄 책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냥 일어서기가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들고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주인의 싸늘한 표정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평소 책을 많이 사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 무뚝뚝한 주인의 눈빛이 그 날 따라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수고하십시오."

빈 손을 앞으로 모으고 총총걸음으로 나오며 주인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

하지만 주인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지 이렇다 저렇다 대꾸를 하지 않았다. 주인의 냉랭한 눈길을 뒤로 한 채 이미 잠겨 있는 앞문 대신 옆문으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서점을 나와서 차가운 초겨울 밤하늘을 보며 주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또 아쉬움을 담아서 크게 한숨을 날려보냈다.

이런 '사건'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서점에 가더라도 문을 닫는 시간까지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또 대부분의 서점은 손님이 하나라도 있으면 쓴 표정 짓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놓기 때문이다.

종이 뭉치가 아니라 '문화'와 '마음의 양식'을 파는 서점. 서점이 있어서 내가 세상에서 뒹굴 공간은 넓다고 할 수 있다.
(200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