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
며칠 전 우리반의 어떤 아이가 수학 문제집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것 좀 풀어보세요."
그 아이가 내민 문제집은 과목별로 나오는 것이었는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학습지 업체에서 나온 것이었다. 표지에는 빨간 색연필로 '혼자 힘으로 푸세요'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문제지를 보니 절반 넘게 진도가 나가 있었다. 문항마다 빨간 색연필로 맞는지 틀렸는지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물어보니 하루 하루 분량이 주어진다고 한다. 반드시 그 분량만큼 풀어야 된다고 했다.
"어떤 문제를 볼까?"
문제집을 이리 저리 뒤지면서 물었더니 그 아이가 해당 쪽을 펴주었다. 그런데 문항을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문제의 내용이 초등학교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손으로 짚은 문제는 거듭제곱의 원리를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였는데 어떤 수의 거듭제곱과 또 다른 거듭제곱의 곱셈이었다.
"이건 중학교에서나 나오는 문제가 아니냐?"
"예, 맞아요."
"그런데 이걸 왜 풀어?"
"복잡한 것 물어보지 마세요. 풀어야 돼요."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 때 거듭제곱이 나온다. 어떤 수를 연속하여 몇 번 곱하면 그것을 거듭제곱으로 간단히 나타내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이다. 한 발 나아가 10의 거듭제곱을 이용하여 천의 자리 숫자를 십진기수법의 전개식으로 나타내는 정도이다.
문제지에서 제시한 거듭제곱 간의 곱셈은 이제 개념을 익히는 초등학생들에겐 추상적인 개념일 수 있다. 물론 아주 뛰어난 수재라면 개념을 뛰어넘어 추상의 단계에서 곱셈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아이는 극히 드물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른 문제를 보았더니 더 가관이었다. 유리수와 무리수가 나오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자연수를 떼고 정수 개념을 배우는 아이들한테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유리수, 무리수는 그야 말로 '무리'일 수밖에 없다.
"너, 앞에서 풀었던 문제는 다 알고 풀었니?"
"아뇨, 그냥 풀었어요."
"어떻게?"
"모르면 그냥 아무 숫자나 넣어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6학년 과정에서 공부해야 할 내용도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는 1학기 수학 성적이 그리 우수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무작정 단계를 높여서 공부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특히 수학은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개념을 딛고 상위 개념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 기본 원리이다.
수학 시간이면 어디선가 초등학교 과정을 다 뗀 아이들은 수업을 도외시한 채 저혼자 앞서서 문제를 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를 놓치고 불안한 마음에서 미래만 대비한다면 결코 미래가 밝지 못할것이다.
남들보다 앞서가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못하는 바 아니나 어쩌면 그러한 선행학습 행태가 아이에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성한 삶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00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