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판단력과 실천
1교시 도덕 시간. 진도가 많이 늦어 아직 1학기 단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도덕은 공부보다 '실천'이 중요한 것이니까.
단원이 끝날 즈음, '실제로 해봅시다' 꼭지가 나왔다.
상황은 '마을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 형들이 와서 농구공을 빼앗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이다.
농구공을 하나 준비해서 실제 역할극을 꾸몄다. 중학생은 제법 덩치가 큰 남학생(성만)로 고정시키고, 농구를 하는 아이는 신청을 받아 번갈아가며 하였다.
첫번째 나온 아이들은 중학생이 농구공을 빼앗자 인상을 썼지만 뒤로 슬슬 물러났다. 표정이 웃겼던지 구경하던 아이들 모두 웃음을 지었다.
두번째 나온 아이들은 숫자로 유리하다면서 중학생을 다짜고짜 힘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중학생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오히려 반격을 시도했다.
세번째 아이들은 황급히 도망가더니 경찰을 불러댔다.
네번째 아이들은 비굴한 표정으로 "형, 같이 하자"며 기댔다.
여기까지 하는데 마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펼친 연극의 내용이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었지만 수업을 연장시키고 의견을 더 받아보았다.
"집에서 공을 가져와 다른데서 놀면 됩니다."
"다 놀고 공을 달라고 하면 됩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아이들의 의견에 내가 쓴 인상을 짓자 뒤에 앉은 한 여학생(지언)이 말했다.
"내 것이니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이 나온 순간 내 표정이 밝아졌는지 모르겠다. 원하던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 지언이의 이야기가 제일 용기 있는 것같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도덕적인 판단은 정해진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내놓는 대안들은 너무 빈약하고 비굴했다. 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 중학생 형들한테 맞아죽는데요."
아이들의 판단이 어떻게 섰는지는 이 대답에서 잘 드러났다. 어쩌면 소문으로 또는 실제 경험으로 중학생들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생각은 가장 현실적인 판단의 근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중학생, 고등학생 깡패라도 진실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고, 때로는 당황하게 된다. 너희가 그런 상황에서 분명하게 '공 주세요. 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중학생 형은 당황하게 될 것이고 억지를 부릴 명분이 없어질 것이다. 설사 공을 빼앗기더라도 그 말을 하고 빼앗기는 것과 아무 말도 못하고 빼앗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이들한테 이런 설교가 얼마나 먹혀들었는지 모르겠다.
내친 김에 더 밀어붙였다.
"만약 너희 여학생들이 뒷골목에서 성폭행을 하려는 아저씨한테 손목을 잡혔다고 치자. 그런 상황에서 아저씨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할까?"
"고함을 쳐야 해요."
여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몇 몇 아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 그 아저씨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고 나쁜 짓을 하고 있어. 그 때 '싫어요. 나쁜 짓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못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니?"
분위기가 제법 진지해졌다. 평소같으면 쉬는 시간이라고 우겼을텐데 모두 잠잠하게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학생 형들도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단 말야. 그러면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니?"
몇 몇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이 수업이 끝나고 난 뒤 뭔가 아쉬움을 느꼈다. 정말 아이들이 그런 상황을 맞을 때 앞에서 나열했던 그런 대응밖에 못할까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서가 아니다. 그런 대응은 초등학생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응방식이다.
그러나 여태껏 도덕 시간이면 아이들은 입으로나마 얼마나 바른 삶을 이야기했던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쉽게 나오던 바른 말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늘의 넋두리는 상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 상식처럼 행세하고 그것이 아이들의 신념 속에 자리잡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가 생기기 때문에 늘어놓았다.
(200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