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11월 27일-그들이 만든 작은사회

늙은어린왕자 2014. 12. 24. 21:30

[교실풍경]
그들이 만든 작은 사회


목요일 아침 활동인 '생각 쓰기'를 하려고 교실을 둘러보니 영~ 할 분위기가 아니다. 보름 전쯤 <종이장난감 가게>가 유행이더니 며칠 전부터 아이들은 <만화책 도서관>에 푹 빠져 있다.

<만화책 도서관> 직원들인 영은이, 가영이, 나연이, 도은이, 진우, 명신이는 교실 뒤에 카운터를 차려 놓고 손님 받기 바쁘다. 그들 뒤에 있는 사물함 위에는 '신간도서' 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신간도서라 해봐야 '마법천자문', 'WHY책' 같은 시리즈물이 대부분이지만 세우거나 눕혀서 수십 권을 줄지어 놓으니 제법 작은 도서관 같기도 하다. 또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도화지를 접어 작은 책자로 만든 창작만화 작품들도 대여섯 개 정도 줄지어 늘어놓았다.

서진이는 바퀴 달린 가방을 여기저기 굴리고 다니며 사람들 실어나르기에 바쁘다. 옆에 있는 아이들이 도서관 전용 차량이라고 귀띔한다. 재웅이는 식물, 동물, 파충류, 세라믹에 관한 '신간'을 가져왔다며 자랑하더니 호객행위에 몰두한다. 직원을 자처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에 열심이다.
 
희은이, 정민이, 지혜, 민재, 지수, 정원이, ... 소비자 노릇을 하는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다. 미처 빌리지 못한 아이들은 빌린 아이들 주위에 둘러서서 같이 보기도 한다. 게임도감을 빌린 경수 자리에는 동혁이, 무성이, 해수, 경호가 둘러서서 아이템에 관해 이야기도 나누고 연구도 한다. 소비자들도 모두가 진지하다.

근데 '도서관'이라고 하는 저 가게의 정체는 뭘까. 손님들 말로는 책을 공짜로는 빌려주지 않는단다. 한 권 빌릴 때 대개 색종이 세 장을 주는데, 두 장짜리도 있고 다섯장짜리도 있고 열 장 짜리도 있단다.

"보통은 3달러고요 재미있어 보이는 건 4달러, 인기 많고 하나밖에 없는 책은 10달러도 해요."

대출 가격을 매긴다는 영은이가 가격 매기는 기준을 진지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색종이 한 장이 1달러라고 덧붙인다. '도서관'이라더니 색종이를 받고 책을 빌려준다면 대여점이 아닌가? 이 때문에 두툼한 색종이 박스를 들고 온 아이들도 몇몇 보인다. 지난번에 '종이 장난감 가게'가 열렸을 때는 경쟁업체가 있어서 그런지 공짜권도 막 뿌리더니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고 딱 네모난 색종이, 현찰을 받는다.  이건 독점의 폐해?

"선생님 저 오늘 열한 권 가져왔어요."

책 싸들고 오느라 늦었는지 준민이가 느즈막히 교실에 들어서며 만화책이 잔뜩 든 손가방을 내보인다. 도서관에 진열할 물건이라고 한다.

영은이 말로는 벌어들인 색종이는 뭘 접기도 하고 다른 가게 열 때 잔돈으로 쓰기도 한단다. 사업을 확장하려는 계획도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교실은 그들만의 사회놀이로 분주하다. 이 놀이는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도 이어진다.

교사로서 이 놀이를 지켜보는 데 조금 인내심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카운터 차린다고 책걸상을 대여섯 개씩 옮겨다니다 보니 공부시간마다 다시 정열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종이달러로 쓰거나 창작만화 만드는 데 쓴다며 가져가는 종이도 만만치 않으며, 무엇보다 쓰레기(!), 한두 시간 지나면 교실바닥이 온통 종이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오늘은 한 사람당 쓰레기 20개 줍기를 두 번이나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다가 불씨가 없어지면 언제 끓었냐는 듯 식어버리는 양은냄비 물처럼 아이들 놀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여유있게 지켜보려고 한다. 학교에 오자마자 말 없이, 인형처럼 제 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내 준 문제를 풀거나 책을 읽거나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옆 아이들과 소통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보내는 이 시간이 아이들의 성장에 훨씬 든든한 거름이 되지 않겠는가. 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런 사회를 만들어내어 노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가! 이들의 삶을 기록해보려고 아침부터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메모했던 수고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2014.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