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4월 15일 - 민서의 굴욕

늙은어린왕자 2010. 6. 16. 14:54

 4월 15일

민서의 굴욕


  읽기 시간에 의견이 드러나는 글의 특성에 관하여 공부했다. 교과서 내용 중에 의견을 주고받는 우체통이 소개되어 있다. 수업이 끝날 즈음 민서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선생님, 우리 반도 우체통 달지요?"

  그러자 너도 나도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럴까? 할 말이 많은가봐?"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니 십여 년 전 이런 우체통을 교실에 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반짝 인기 있다가 거의 이용하지 않아서 없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어떨까?"

  내 제안에 잠깐 뜸을 들이던 아이들이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한 사람씩 일어서서 발표했다. 

  먼저 규리가 말했다.

  “저는 가연이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하면서 툭툭 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면 무척 아프니까요.”

  구완이도 비슷한 의견을 말했다.

  “정훈이가 아프도록 몸을 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연이와 정훈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넘어가주었다. 용은이도 경민이한테 머리를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모두 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민서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고 일어섰다.

  "여러분한테 입 냄새가 지독하게 납니다. 치카치카 좀 잘 해주기 바랍니다."

  갑자기 교실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너나 잘 쳐라."

  "니한테도 냄새 엄청 난다."

  민서도 만만치 않았다.

  "난 얼마나 잘 치는데. 날마다 닦는다."

  민서가 자신 있는 표정을 짓자 동협이가 씩씩거리며 한 마디 했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이 안 닦은 주제에!"

  아이들은 동협이 말에 크게 웃었다. 민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에 밀려 말을 잇지 못했다. 민서의 굴욕은 이렇게 해서 생겼다.

  언제나 당당한 민서가 굴욕을 어떻게 헤쳐 나갈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