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11월 8일 - 밥 보다 놀이

늙은어린왕자 2010. 11. 9. 00:28

11월 8일 월요일 낙엽이 출근길 차창을 치고 떨어지는 날. 구름 조금

밥 보다 놀이


  “선생님, 우유를 먹었더니 배가 울렁거려서 밥을 못 먹겠어요. 안 먹어도 돼요?”

  급식소에서 밥을 받으려는데 찬기가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때때로 우유를 먹고 배 아프다는 일이 있어서 별 의심 없이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수민이, 시현이, 동협이, 성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한테 물었더니 축구 한다며 살짝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밥을 한 숟갈 뜨다 말고 운동장으로 나갔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집으로 돌아갔을 리는 없고, 짐작 가는 곳은 교실이었다.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찬기도 의심이 되었다. 아이들하고 놀려고 배 아프다고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급식소로 돌아와 영양사 선생님께 밥 다섯 그릇을 남겨두라고 부탁하고 교실로 아이들을 보냈다. 잠시 뒤 없어졌던 아이들이 내려왔다. 큰 벌이라도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두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우선 밥을 받아먹도록 했다. 배 아프다던 찬기도 별 말 없이 밥을 받아와서는 허겁지겁 먹었다. 한동안 잔소리를 쏟아냈는데도 녀석들은 아무 말 않고 밥만 먹었다. 잘못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들! 밥도 안 먹고 놀면 되나? 너희들이 밥 안 먹고 집에 간 걸 너희 부모님이 알아봐라. 아이들 관리 잘못 했다고 너희 선생님이 욕 듣는다.”

  영양사 선생님까지 옆에서 거들자 아이들은 더더욱 궁지에 몰린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한테 야단맞고 낑낑거리는 강아지마냥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벌은 이 정도로 됐다 싶어서 까닭을 캐물었다. 

  “동협아. 왜 밥 안 먹었노?”

  “놀려고요.”

  “시현이는?”

  “저도요.”

  “성진이도?”

  “예.”

  카드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밥 까지 안 먹고 하려 했을까. 수민이는 식단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축구나 카드놀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녀석이라 핑계로 들렸다.

  “찬기는 배 아프다는 말 거짓말이었지?”

  “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해주는 녀석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는 야단치지 않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돌려보냈다.

  아이들 말을 되짚어보니 카드놀이를 하고 싶던 차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식단이 녀석들을 교실로 돌아가게 했던 것 같았다. 허락 없이 간 것은 잘못이지만 과감하게 밥 보다 놀이를 선택한 용기는 격려라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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