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금요일 구름 조금
죗값
“선생님, 왜 우리한테는 체험학습 간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
“3학년 1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체험학습 준비물 알아봤다구요. 이게 말이 돼요?”
“다른 반은 간식도 다 싸왔어요.”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자마다 아이들한테서 불평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어제 알림장 안 써준 대가다. 오늘은 박물관 체험학습도 있고 어머니회가 준비한 바자회도 있는 날인데 하필 이런 날을 앞두고 알림장을 빼먹었다.
“아, 알았다. 미안! 정말 미안!”
“미안하다고 하면 다에요?”
“선생님은 꼭 중요한 이야기는 말 안 해줘요. 실망이에요.”
이럴 땐 뭔가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마땅히 둘러댈 게 없었다.
“그러게 말야. 근데 1학년, 2학년은 우리 보다 멀리 가서 체험학습이지만 우리는 제일 가까운 데 가잖니. 잠깐만 갔다 오는 거야. 그러니 체험학습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럼 1반은 뭐예요. 걔들은 다 준비했단 말이에요.”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 전했다. 알림장 써주는 게 얼핏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게을리 하면 뒷일이 이렇게 커지기도 한다.
박물관에 가기 전에 바자회에 잠시 들렀는데 거기서는 큰 불만이 없었다. 학교에서 준비한 500원짜리 쿠폰을 모두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쿠폰이 없었으면 어찌되었을까. 잔소리 폭탄이 날아오지 않았을까.
10시에 운동장에 모여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수첩 대신 A4 용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메모지로 쓰도록 했다. 곧 박물관에 도착해서 한 시간 남짓 유물을 둘러보았다. 유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 다섯 가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과제를 주었더니 대부분 열심히 잘 했다.
이제 학교에 들어가서 조사한 것을 정리만 하면 체험학습은 무사히 끝난다. 그런데 옆 반 선생님이 돌아갈 시간이 너무 이르다며 대성동 고분박물관도 둘러보고 가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발걸음을 대성동으로 옮겼다.
고분박물관 앞에 이르자 먼저 이쪽으로 온 2학년들이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더니 한동안 잠잠하던 불만 소리가 또 나왔다.
“아, 맛있겠다.”
“2학년들은 간식 먹는데 우리는 뭐에요?”
“선생님이 우리 간식 책임지세요!”
2학년들을 바라보며 입맛 다시는 아이들 모습도 애처로운데 무엇보다 책임지라는 말이 가슴에 팍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죗값을 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요, 선생님이 간식 사주려고 준비 안 시켰나 보다 하던데요.”
미경이 말이 마치 얼른 가게로 가라며 등 떠미는 소리로 들렸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너희들 간식 사 올게.”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 자연스러운 장면을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역시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서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데 네 명의 가야시대 무사가 보였다. 그래 바로 저거야!
“얘들아, 여기 가야 시대 무사가 네 명 있어. 모두 다른 옷을 입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무사 앞에 서 보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무사들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마음에 드는 쪽으로 가서 섰다. 철갑옷을 입은 북방계 무사가 인기 있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자기가 선택한 무사와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나도 마음에 드는 무사가 있는데 나와 같은 무사를 선택한 사람한테는 맛있는 간식을 사 줄거야.”
간식이 걸렸다는 말에 아이들이 술렁였다. 안에서 발표를 하면 박물관이 시끄러울까봐 일단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둘러선 가운데 발표를 했다.
“내가 선택한 무사는 …….”
아주 중요한 발표를 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선택한 무사는 모두 다다! 네 명 모두 마음에 들어!”
이 순간 모두가 “그럼 우리 모두 다 사주는 거예요? 와!” 하며 함성이 나올 줄 알았다. 정작 돌아온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에이.”
“뭐에요?”
짜릿하게 자기 무사가 선택되기를 바랐는데 뭐가 그리 싱겁냐는 반응이었다. 내 연기가 너무 어설펐나?
어쨌든 모두에게 간식을 사 주기로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뿔싸. 주변이 모두 유적 공원이다 보니 가게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가게가 수백 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얘들아, 주변에 가게가 없어서 오늘은 간식 못 사주겠다. 다음 주에 꼭 사줄게.”
아이들 표정을 보니 이미 기대를 접은 듯 했다. 대부분 반응이 없고 얼른 학교나 가주었으면 하는 표정들이었다. 죗값 치르기도 참 힘들다.
'삶을가꾸는글쓰기 > 2010 교실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 15일 - 추위도 잊은 아이들 (0) | 2010.12.16 |
---|---|
12월 13일 - 숙제 (0) | 2010.12.13 |
12월 9일 - 이렇게 바쁘면 (0) | 2010.12.13 |
12월 8일 - 다시 <오세암> (0) | 2010.12.10 |
12월 7일 - 교실은 눈물바다 (영화 <오세암>을 보고) (0) | 2010.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