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9월 7일 - 진실 도장

늙은어린왕자 2011. 9. 7. 19:38

9월 7일 수요일 운동장에는 햇볕이 따갑지만 실내에는 바람이 시원하다.
진실 도장

 

 

  아침에 화장지를 모을 때였다.
  “선생님, 저 화장지 또 가져왔어요.”
  채미가 이렇게 말하며 화장지를 내밀었다. 어제 가져왔는데 또 가져왔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희지도 또 가져왔다며 화장지를 들고 나왔다.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속으로 얘들이 왜 이러지 하며 희지한테 물었다.
  “고마워 희지야. 근데 엄마가 하나 더 주셨니?”
  “아뇨. 선생님이 하나 더 가져오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여태껏 열다섯 번 넘게 반을 맡았어도 한 학기에 개인화장지를 두 개씩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홈페이지 알림장에 그렇게 적었잖아요.”
  희지는 거짓말을 하거나 아침부터 농담을 건넬 아이가 아니다. 당장 우리 반 누리집 알림장을 폈다. 사실이었다.

 

  ‘개인화장지 가져온 사람 또 가져오기’

 

  어제 알림장에는 분명히 ‘개인화장지 안 가져온 사람 가져오기’로 적어주었다. 누군가 손 댄 것이 틀림없었다.
  “아침에 엄마가 알림장 똑바로 안 적었다고 말했어요.”
  희지는 눈물을 글썽였다. 공책에는 내가 써준 대로 적었는데 누리집에 있는 것과 내용이 다르다고 엄마한테 지적받은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세진이도 화장지를 하나 더 가져왔다.
  화가 올라왔다. 예전에도 칠판에 적어둔 알림장에 받침을 바꾸거나 글자를 없애서 다른 뜻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장난치지 말라고 말만 하고 넘어갔다. 이번에는 뒤바뀐 내용 때문에 피해를 본 아이가 세 명이나 될뿐더러 내가 쓰는 물건에 손댄 것이 괘씸해서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아이들을 모두 자리에 앉히고 누가 그랬는지 물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5분, 10분, 20분, …‥ 아무리 기다려도 자백하는 아이가 없었다. 한별이와 유진이는 알림장에 손은 댔어도 다시 원래대로 내용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했다고 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오늘 없으면 내일도 기다린다. 그리고 그 때까지 쉬는 시간에는 볼 일만 보고 자리에 앉아야지 못 논다. 체육 수업도 1학기 때는 운동장 수업을 많이 해주었는데 이제는 실내수업 위주로 할 거다.”
  이렇게 압박해도 별 수 없었다. 체육을 실내에서 한다는 말에 몇몇 남학생들이 뜨끔하기는 해도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한별이, 유진이 말고도 자판 주위에서 어슬렁거린 아이들이 더 있다는 걸 보면 분명히 누군가 했을 텐데 아이들 눈길이 두려워서 못 나오는 게 틀림없었다.
  “좋다. 더 기다려도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진실의 도장을 찍겠다. 한 번 양심을 속이면 평생 마음에 찌꺼기로 남는다. 양심을 절대 속이지 말고 했는지 안 했는지 솔직하게 찍기 바란다.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만 밝히려는 거다.”
  내일까지도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범인’ 밝히는 건 포기하고 마지막 방법으로 진실 도장을 찍기로 했다. 두려운 마음에 ‘내가 했소이다’ 하며 남들 앞에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밝혀서 마음을 털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했다’와 ‘안 했다’를 표시한 용지를 준비하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책상 아래에서 한 명씩 도장을 찍어나갔다. 그리고 용지함을 열었더니 딱 한 사람이 ‘했다’에 도장을 찍어놓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진실하게 했다고 밝혀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고] 진실의 도장에 '했다'고 표시한 사람이 누군지 찾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불행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주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