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금요일 맑고 쌀쌀함
인간으로 남은 성윤이
“점수 알려주세요.”
“아직 안 나왔다. 어제 그대로다.”
“어제 뭐하셨어요?”
“저녁에 일이 있어서 말야.”
“…‥.”
어제 치른 기말고사 점수를 궁금해 하는 아이들과 하루 내내 이렇게 실랑이를 벌였다. 대개 시험을 치르면 그 날 채점을 다 하는데 이번에는 과목도 여덟 개나 되는데다 저녁에 행사가 있어서 다 못 매긴 탓이다.
수업이 끝난 오후에 남은 네 과목 채점에 들어갔다. 청소하던 아이들, 집에 가려다 발길을 멈춘 아이들이 내 책상 주위를 에워싼 채 채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빨간 색연필을 쥔 내 손길에 따라 비명을 질렀다. 남의 시험지에 동그라미가 많을 때는 ‘저주’ 섞인 소리를, 틀려서 사선이 그일 때는 ‘환호’ 섞인 소리를 재미로 질러댔다.
‘저주’가 가장 많이 나온 아이는 성윤이였다. 어제까지 네 과목 모두 백 점을 받은 데다 오늘도 매기는 과목마다 백 점이 나왔기 때문이다.
“니가 인간이가?”
“넌 저주받아야 돼.”
백 점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성윤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저주’를 퍼부었다. 성윤이는 그럴 때마다 능청맞게 응수했다.
“흠, 내 때문에 고통 받게 된 거 미안하게 생각한다. 으흠.”
아이들은 성윤이의 이런 뻔뻔한(?) 태도에 더욱 약이 올랐다.
채점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우르르 모여 있던 아이들은 어느 새 제 갈 길을 가고 서너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남은 아이들의 관심은 자기 점수 못지않게 성윤이가 올백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쏠렸다.
이제 남은 것은 도덕 한 과목. 100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과목이라 누구도 성윤이의 올백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올백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은근히 기대하던 성윤이는 방과 후 수업에 가고 구경꾼들만 남아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드디어 성윤이 시험지가 나오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과연 성윤이는 공부의 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내 손길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이번 도덕 시험은 4번 문제가 까다롭게 나왔다. 공부를 잘 한다는 아이들도 4번이 많이 틀렸다. 성윤이는 과연 4번의 고비를 넘을 수 있을까?
긴장감을 느끼며 성윤이 답란을 언뜻 보니 틀린 답이 쓰여 있었다. 빨간 색연필은 4번 문제 위로 동그라미 대신 사선을 긋고 지나갔다. 성윤이 시험지에 처음으로 사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
어찌된 일인지 구경하던 아이들의 입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섞인 어정쩡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이 틀리는 걸 좋아하는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올백이 한 명이라도 나와 주기를 바랐던 마음이 묻어났다.
성윤이는 결국 이 한 문제로 신이 되지 못하고 인간으로 남았다. 마치 올백을 받고 ‘저주’받는 신이 되는 대신 실수 때문에 격려 받는 인간이 되려고 계획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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