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아이 깜짝 가정방문기
오전 9시 20분쯤 6학년 2반 선생님이 교무실로 와서 반 아이 수민이가 학교에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4학년인 동생으로부터 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걱정이 된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담임선생님이 직접 가서 아이 상태를 확인하면 좋겠지만 교실에 아이들이 있으니 내가 갔다 오기로 했다.
수민이와 민영이는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다. 둘 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과학수업을 해서 사정을 대략 안다. 얼굴에는 그늘이 엿보이지만 둘 다 과학수업에는 열심히 참여한다. 수민이는 말도 잘하고 글씨도 꽤 좋은 편이다. 동생 민영이는 언니보다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 더 눈에 띄고 머리도 부스스하게 정돈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표정은 언니보다 밝다.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고 있는 민영이를 차에 태우고 교문을 나섰다. 민영이한테 언니 상황을 물으니 6학년 2반 선생님 말과 같은 대답을 했다. 집에는 필리핀 사람인 삼촌이 있을 거라고 했다.
집은 가까웠다. 수로고등학교 맞은편에서 골목으로 두 번 꺾어 들어간 곳에 있었다. 작은 골목에는 마치 옛날로 되돌아온 것처럼 70-80년대에 볼 수 있던 담과 대문이 그대로 있었다.
민영이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데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의심스런 눈으로 이방인을 훑어보았다.
"김해초등학교에서 왔는데 아이가 학교에 안 와서 데리러 왔습니다."
할머니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 입에서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할머니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차 짐칸에서 카메라용 외다리 모노포드를 꺼내들었다. 삼촌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유사시에 호신용 몽둥이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더욱 의심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할머니와 잠깐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민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대문이 다닥다닥 마주보고 있는 좁은 골목으로 뛰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 때 마침 다른 할머니 한 명이 지나가기에 민영이 집에 간다고 했더니 앞쪽에 있는 한 집을 가리켰다. 하지만 민영이는 그 집에 없었다. 그러자 처음 만났던 할머니가 골목 끝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집에는 민영이가 있었다.
단층에 슬레이트 지붕이 얹힌 집 안은 70-80년대 빈민가를 떠올릴 만큼 허름했다. 어제 들렀던 합천영상테마파크의 50-60년대 골목세트보다 더 뒤처져보였다.
수민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민영이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수민이네 방 오른쪽에는 어떤 할머니가 산다는 방이 있고, 그 맞은편에도 다른 식구가 사는 방이 있었다. 모두들 비슷한 처지로 보였다.
잠시 뒤 옷을 갈아입은 수민이가 나왔다. 방 안을 보고싶었지만 문이 안을 볼 수 없는 방향으로 열리는데다 사생활에 너무 관여한다는 느낌을 줄까봐 억지로 보지않았다. 문이 하나 더 있는걸로 봐서 삼촌은 그 방에 있는 듯했다.
수민이는 아침에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갈까 생각하다가 학교에 안 갔다고 했다. 전화가 없어서 삼촌 전화기를 빌려서 담임선생님과 조금 전에 통화도 했다고 덧붙였다. 삼촌 얘기가 궁금해서 좀 더 캐물었더니 엄마 동생인데 야근을 해서 자고 있다고 했다. 엄마 동생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해서 더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았다. 아빠는 이혼하고 없고, 엄마는 일찍 일하러 나가고, 다 큰 아이가 삼촌이랑 늦은 시간까지 자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 정도로 얘기를 끝냈다.
예기치 않았던 가정방문을 끝내고 마음에 몇 가지 여운이 남는다. 우리처럼 구도심에 위치한 학교에서 좀 더 신경 써야 할 아이들이라면 빈곤상태에서 방치되거나 다문화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다. 수민이와 민영이는 두 조건 모두 해당되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또 이런 아이들이 대부분 학력이 뒤처지는데, 학력을 끌어올린다며 잡아놓고 공부 시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한 가지 반성되는 점은 이 학교에 5년째 일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몇 명 담임하면서도 애정을 가지고 가정방문 한 번 안 한 것이다. 그동안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교실에서 모든 일을 다 한 것처럼 위선 떨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교사노릇을 하려면 가정방문이든 뭐든 좀 더 희생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3.3.20)
*모든 이름은 가명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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