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이
1.
"혹시 집에 안 쓰는 가방 없어요? 민영이가 떨어진 가방을 메고 다녀서요."
며칠 전에 5학년 선생님이 이렇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 말로는 민영이가 엄마 없이 아빠랑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빠도 병원에 입원해서 돈 벌어올 사람이 없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집에 언니가 있기는 하지만 언니도 학생인데다가 보통의 아이로 보기에는 힘든 구석이 있다니 사정이 참 딱했다.
가방이라도 구해주려고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딸들한테 물어보니 안 쓰는 가방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새 걸로 하나 사줄까 생각만 하다가 이틀 정도 일에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그만 민영이 생각을 잊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민영이가 강아지 집 앞에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니 메고 있는 가방이 정말 낡아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곳도 있고 껍질이 벗겨진 곳도 있었다. 새 걸로 하나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더 놀란 건 민영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옷도 가방 못지않게 낡아 구멍이 나고 너덜거리는 곳도 있었다.
민영이는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 문제가 없다는 표정으로 현관을 나섰지만 그런 민영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참 무거웠다. 똑같은 나이의 우리 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느 집 딸들이 그렇겠지만 우리 딸도 아침마다 학교 갈 옷을 골라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뽐을 내곤 한다. 그러다가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면 화장하고 있는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러쿵 저러쿵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민영이라고 뽐을 내고 싶지 않을까. 또 코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엄마한테 하소연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민영이는 골라 입을 옷도, 응석 부릴 엄마도 없이 떨어진 옷 억지로 끼워 입고 구멍 뚫린 가방 메고 학교에 왔으려니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집에 와서 아이들 엄마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마침 우리 아이들 몸에 맞지 않아서 넣어둔 옷이 있다며 한 가방 챙겨주었다. 가방도 학교에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있다며 내일 가져오겠다고 한다. 가방이라도 하나 챙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옷도 제법 입을 만큼 구해서 무척 다행이다 싶다.
이런 일회성 도움이 민영이처럼 어렵게 사는 아이들한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그런 문제를 보고도 지나칠 뻔해서 마음이 무거웠던 나에게는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하다. 민영이가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가방을 메고 즐거운 표정으로 학교를 다니면 위안을 넘어 기쁨이 될 것 같다. (5월 8일)
2.
지난 7월 13일에 6학년 한 여자 아이의 신발이 중앙현관에서 사라졌다. 어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오셔서 새로 산 샌들이라며 CCTV로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일러준 장소와 시간으로 화면을 돌려보니 놀랍게도 범인은 민영이였다. 검은 신발을 신고 와서 어디론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흰 샌들로 갈아 신는 모습이 똑똑히 잡혔다.
담임선생님한테 이 사실을 알렸더니 민영이를 즉시 데리고 왔다. 민영이는 CCTV에 자기 모습이 나오자 거짓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민영이는 훔친 경위른 묻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만 흘려댔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민영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배상을 요구했다. 신고 다니다가 들킬 것을 걱정했는지 민영이가 신발을 슬리퍼 모양으로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배상을 약속했다.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님 말로는 민영이가 방과후교실에서 다른 반 아이 전화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이 일은 증거가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었는데 결국 민영이가 가져간 걸로 밝혀졌다고 한다. 민영이는 마지막까지 참말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 때는 전화기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는 담임선생님 말이 이해됐다.
며칠 뒤 고등학생인 민영이 언니가 신발값이라며 5만원을 들고 왔다. 그 돈은 곧바로 6학년 아이 어머니한테 전달됐다. 그런데 이튿날 2만원이 되돌아왔다. 민영이에게 필요한 거라도 사주라며 말이다. 그 어머니도 민영이 사정이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담임선생님은 민영이가 앞으로 더 큰 일을 벌일지 모른다며 걱정했다. 무엇보다 일을 벌이면서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게 큰 문제라고 했다. 선생님이 보기에 민영이 뿐만 아니라 언니, 오빠도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민영이가 최소한의 도덕 기준을 가지도록 지도할 거라고 덧붙였다.
3.
김해 구도심에 자리잡은 우리 학교에는 민영이처럼 밑바닥 생활을 하는 아이가 많은 편이다. 또 결손가정도 상당히 많다. 시내 한가운데 있지만 이런 아이들 숫자나 비율만 보면 한물 간 도시변두리 지역과 비슷하다.
여름방학 첫날인 오늘, 1박 2일 일정의 직원연수에 참여하려고 학교로 오는데 4학년 한 남자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 없이 아빠와 사는 이 아이는 모르는 직원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제 멋대로 행동하기로 소문났다. 과학실에서 나도 이 아이 때문에 고함도 많이 치고 심지어 의자를 집어던지면서 다투기도 했다.
평소에도 학교를 왜 오는지 구분하지 않는 이 아이에게는 어제 한 방학식조차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방학한 것도 모른채 평소처럼 무심코 등교하던 이 아이는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오늘부터 학교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쓸쓸히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보통의 아이들에게 방학은 학교에서 해보지 못한 공부나 체험을 하는 유익한 시간이지만 이 아이에게는 방학이란 33일 동안 유일하게 갈 곳을 잃어버리는 기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7월 쓰고 8월 글쓰기회보에 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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