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생활일기

만화 학교를 다니며

늙은어린왕자 2014. 12. 24. 21:12

이런 저런 핑계로 서점을 잘 들르지 않던 내가 최근 들어서는 자주 서점에 들어간다. 만화책을 사기 위해서다. 노리는 만화책은 작품성 있거나 그림의 질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평이한 그림 수준과 내용을 가진 책들이다. 주로 학습만화나 역사, 시사만화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처음부터 작품의 줄거리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화를 그린다면?'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만화로 내 생각을 남에게 펼쳐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시피 할만큼 '만화까막눈'인 내가 만화를 그려보겠다고 덤비니 자연히 그림이 단순하면서도 학습지도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지닌 책에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화에 문외한이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만화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은 남포문고와 부산교육연구소에서 준비한 '교사를 위한 만화교실' 강좌를 수강하면서부터이다. 만화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호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만화가 교사와 아이들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강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요즘 각광 받는 '에니메이션 교실'을 수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에니메이션이 아이들의 눈을 확실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좋은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즉시 제작하여 활용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만화는 수업 시간 어느 부분에서든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손쉽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에니메이션의 제작의 기초가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 만화를 수강하게 되었다.

만화 강좌는 전반기까지는 주로 얼굴 표정, 몸동작 그리기에서부터 만화 일기 그리기, 우수 작품 베껴그리기, 작품 감상 등의 기초 기능 훈련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다. 15명 가량의 적은 인원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 되어 서로가 손가락을 떨며 그린 그림을 돌려보고 느낀 점을 한마디씩 나누면서 숨은 재능을 뒤늦게나마 찾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후반기에는 자신만의 캐릭터 구상과 함께 만화를 교육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고, 아울러 수강생들이 흘린 땀방울들을 모아 전시회도 연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만 그만큼 기대도 크다. 여기서 내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강좌의 숨겨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화의 교육 현장 적용'에 관한 내용이다. 아직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지만 어느 교과에서, 수업의 어떤 부분에서 활용이 가능할까 고민중이다.


만화 강좌를 수강하면서 수업 시간에 생긴 변화는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연 시간에 실험 장치 따위를 주로 그렸는데 요즘 들어서는 수학 시간에 문장제 문제를 그림으로 나타낸다든지 사회 시간에 역사 인물이나 상황을 그림으로 자주 나타낸다. 단순한 삽화에 불과하고 그림의 질도 매우 낮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이들의 시선이 몰린다는 것이다. 또 서투르게 그린 그림도 아이들은 모두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자연 시간에 전자석 만드는 과정을 칠판 가득 그림으로 나타낸 적이 있었다. 커다란 못에 에나멜선이 촘촘히 감긴 그림과 전기회로를 그렸더니 아이들이 "우와, 진짜같다!"며 내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그림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반 44명의 아이 중 전자석을 만들지 못한 아이는 단 2명에 그쳤다.
또 한 번은 수학 시간에 원과 부채꼴의 넓이 구하는 방법을 응용한 여러 가지 도형 문제를 풀게 되었는데, 칠판에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진 도형을 그려나가자 조용히 지켜보던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 그림 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진짜다" 하며 맞장구를 쳤다. 누가 봐도 서투른 그림이었지만 그네들에게는 친밀하게 다가갔던 모양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선 엉성하더라도 만화 교실을 수강한다는 자부심으로 자신감을 갖고 습관처럼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차차 만화를 수업에 적극적으로 끌여들이는 방법을 연구해야겠지.

아직은 머리가 요구하는 만큼 손이 따라주지 않아 고생하고 있지만 만화교실 수강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직 생활에 커다란 보탬이 되리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학습지도시 나만의 강력한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남은 기간 동안 정진을 다짐하며....
(20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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