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때의 일입니다.
추석을 맞아 밀양 고향집 사랑방은 대청소가 한창이었습니다. 재작년 태풍 매미 때 처마와 지붕 일부가 날아가는 바람에 비가 많이 샜는데 비닐로 땜질을 해서 쓰다가 올 해 새로 단장을 했지요. 얼마 전에 부모님이 도배까지 해 놓아 다시 깔끔한 옛 방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해야 할 몫은 책장의 책을 정리하는 일이었지요.
내 키 만한 구식 책장 안에는 정말 갖가지 책이 꽃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보시던 조선왕조 이야기 '왕비열전' 이 전질로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로 제가 대학 때 보던 사회과학 책들과 소설책, 교양서들이 두 줄 정도 꽃여 있었습니다. 그 아래로는 동생이 보던 순정소설과 각종 앨범, 대학시절 모아두었던 각종 교지와 학회지, 동아리 회지가 어지럽게 꽂혀 있었습니다.
"제발 안보는 책 좀 버려라."
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보지도 않으면서 책을 꽂아두어서 방만 차지한다고 그러셔요. 지난 겨울에 한 번 정리했는데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더구나 도배까지 해서 새 방으로 꾸몄는데 복잡한 책장이 어수선하게 서 있으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 밖에요.
"내일 별 일 없는데 하지요."
모처럼 집에 왔는데 오자 마자 일을 하려니 몸도 피곤한 것 같고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레가 추석이니 내일쯤 일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TV를 얼마나 봤는지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시계는 11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당으로 나가보니 휘영청 달빛이 고요한 시골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밤안개가 이슬 머금은 산과 들을 포근히 감싸며 돌아가고 있는 풍경이 너무나 정겨웠습니다.
사랑방에는 불을 훤히 켜놓고 어머니 혼자서 무언가와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곡식이라도 고르면 같이 해볼까 싶어 내려갔는데 책장에 있던 책이 모두 방바닥에 쌓여 있었습니다. 책장에 있던 책을 바닥에 쌓아 놓으니 책이 얼마나 많던지 조그만 산을 이루고 있었지요. 그 한 켠에서 어머니는 책을 한 권 한 권 훑어보고는 한 쪽으로 쌓아두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뭐하고 있어요?"
"7만원 찾았다. "
"아니, 무슨 돈을 찾았다고..."
"용돈 조금 있을 때마다 책 속에 숨겨놓았는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에이, 그냥 알기 쉬운데 놔두면 찾기 쉬울텐데 책 속에 넣어두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요."
평소에도 어머니는 돈이 생길 때마다 이 곳 저 곳 생각 나는대로 넣어두고 못찾곤 하였습니다. 옷장이나 서랍장도 많이 이용했는데 책에도 제법 숨겨둔 모양입니다.
"그럼, 그 돈을 언제 넣어두셨단 말이에요?"
"작년 것도 있고 한 5년 된 것도 있고 그 전에 것도 있고 ... "
돈을 넣어두고 못찾아 지금까지 마음 속에 넣어두었을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습니다.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또 찾으셔요."
"아까 좀 자서 괜찮다. 가서 자라."
하지만 나도 옆에 앉아 책장을 넘겼습니다. 혹시나 있을 지 모를 돈을 찾는 것도 관심이 갔지만 여기 있는 책들은 10여년 전 내 손을 거쳐간 것들이라 책장 사이 사이에서 추억도 묻어났습니다.
얼마나 책을 오랫동안 보지 않고 꽂아두었던지 책장을 넘기자 먼지가 훨훨 날아가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나 하나 보고 있는데 구들방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아버지가 나오셨어요.
"너거 엄마가 디돼서(어리석어서) 이래 안하나."
아버지는 이미 사정을 알고 계신 듯 했습니다.
"그래도 7만원이나 찾았다는데예."
아버지는 그 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당장 자러 가라고 불을 끄기도 했으련만 아버지도 어느 새 앉아서 책장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방을 나왔지요.
이튿날 아침에 사랑방에 가보니 책들이 모두 방 한켠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버릴 책과 꽃아놓을 책을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나에게 몇 만원은 작은 돈이지만 어머니한테 주는 의미는 다릅니다. 누가 훔쳐갈까 싶어서 숨기는 것도 아니고 보관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평생을 없이 살아온 어머니 손에 들어오는 돈은 크기 보다 소중함 그 자체입니다.
어머니의 금고를 정리하면서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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