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늙은어린왕자 2006. 9. 19. 11:55

 

 

  지난 주말에 밀양에서 밤을 닷 되 정도 주워왔다. 올 해는 우리 집 밤농사가 다른 해보다 잘 되어서 맛이 타박고구마처럼 좋다. 벌레 먹은 밤도 거의 없다. 약을 일부러 친 것은 아니지만, 밤나무가 단감나무 사이사이에 드물게 있다 보니 단감에 약 칠 때 밤나무에도 약발이 닿은 모양이다. 덕분에 저녁마다 토실토실 타박타박한 밤을 까먹는 재미가 솔솔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삶아놓은 밤 한 소쿠리가 식탁에 있었다. 숟가락으로 몇 개 파먹다가 더 먹을 시간이 없어서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담았다.

  “자기, 어떻게 할려고 그렇게 많이 담아가는데?”

  따지듯 묻는 아내 말에 나는

  “응, 내 먹을려고. 3, 4교시 되면 배 고프잖아.”

대충 답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

  탁자 위에 밤을 내려놓으니 아이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았다.

  “쌤, 맛있겠네요. 하나만 주죠.”

  한 녀석이 입맛을 다시며 다가서자 너도나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애원이 빗발쳤다.

  “저도 하나 주지요. 제발.”

  “저도요, 멋진 쌤.”

  집에서는 맛난 음식도 거들떠보지 않을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맛없는 것도 남들이 먹으면 서로 먹으려 한다. 내가 그걸 모를 줄 알고? 이럴 땐 무조건 튕기는 것이 제일 값진 대응이다.

  “이거 내가 얼마나 힘들게 주웠는지 아나? 밤송이에 찔려봤나. 얼마나 아픈지 아나? 아무도 안 된다. 못준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밤을 쓰윽 감싸니까 아이들은 입을 삐쭉거렸다. 못 먹는 밥에 재 뿌린다고 했던가.

  “쌤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쌤 너무하네.”

  “쌤 돼지.”

  이런 비난을 미리 짐작하지 못했겠는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내놓지를 않았지. 아이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튕김질’ 작전은 기분 좋게 성공하였다. 어찌나 고소하던지.

  

  #첫째 시간

  내 자리 바로 앞에는 이현성(가명)이라는 남자 아이가 앉아있다. 말도 느리고 글자쓰기도 잘 안 되는 아이다. 6학년이지만 덧셈, 뺄셈도 어려워할 만큼 수학도 뒤처진다. 어눌한 말투, 느린 행동 때문에 학기 초에는 친구관계가 좀 어려웠지만 심성이 워낙 착해 아이들이 두루 좋아한다.

  이 녀석이 책상 위의 밤을 한참 바라보더니 내가 한눈파는 사이 하나를 손에 넣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힐끗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네 이놈, 얼른 놓지 못할까?”

  그랬더니 얼른 놓고 손을 무릎 위로 쏙 가져가는 게 아닌가. 속으로 '이 녀석, 밤이 정말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수업이 끝나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또 ‘튕김질’로 물리치고 나니 현성이만 남았다. 하긴 이 아이는 자기 자리가 맨 앞이니 어디 갈 필요가 없기는 하다. 현성이는 또 눈치를 보며 밤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성생님, 이거 하나 사면 안 될까요?” (‘선생님’을 ‘성생님’이라고 발음한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 개에 얼마 줄 건데?”

  현성이는 손에 있는 동전을 내보이며 말했다.

  “500원요.”

  정말 손바닥에는 500원짜리가 있었다. 녀석의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소리 내어 웃으려다가 참았다.

  “임마, 밤 하나에 500원 주고 사는 사람이 어딨냐. 너 돈이 그렇게 많냐?”

  현성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아이들은 논다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얼른 현성이 손에 밤 하나를 쥐어주었다.

  “500원은요?”

  역시 돈을 주고서라도 밤을 먹겠다는 현성이의 마음은 진실이었다.

  “됐다. 그냥 먹어.”

  그러고는 두 개 더 쥐어줬더니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둘째 시간

  현성이가 밤을 까먹는 걸 본 아이들이 자기들은 안 준다고 성화를 부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나. 어서 책 펴라.”

  제법 투덜거리긴 했지만 두 번이나 ‘튕김질’을 당한 아이들은 이제 그림의 떡이려니 하는 표정들이었다. 너무 튕겼나?

  아이들은 열심히 수학익힘책을 풀었고, 현성이는 밤을 열심히 까먹었다. 그런데 현성이가 먹는 걸 보니 나도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앞에서 무얼 먹게 되면 아이들의 거센 비난과 마주해야 한다.

  때때로 아이들이 학교에 과자나 간식을 들고 와서 먹을 때 이렇게 야단을 친다.

  “야, 넌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서 먹을 수 있노. 안 가져오던지 많이 사와서 나눠주던지 해야지.”

  만약 내가 아이들 앞에서 무얼 먹으면 이렇게 비난을 할 것이다.

  “선생님은 어린 제자들이 보는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안 가져오시던지, 다 나눠주시던지 해야지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연구실 같은 곳에 가서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좀 변화를 주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수업이 10분 쯤 남았다. 미리 생각해둔 작전에 들어가기 위해 밤을 세어보니 대략 70개 쯤 되었다. 서른일곱 명 아이들에게 하나씩 가더라도 내가 먹을 분량은 충분히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넘겨줄 내가 아니지. 그래서 밤 하나를 들고 이로 두 쪽 낸 뒤 알맹이를 씹어서 빼먹었다. 달콤한 표정을 지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입을 대기 시작했다.

  “어, 쌤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와 실망이다.”

  아이들의 비난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작전을 ‘지시’했다.

  “좋다. 그럼 수학익힘책 다 풀고 검사 맡으러 오는 사람은 한 개씩 준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다 푼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책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딴 짓을 하던 아이들은 그제서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뒤늦게 문제를 푼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밤은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갔다. 빨리 검사를 맡은 아이들은 큰 것을 골라갔고 뒤늦게 온 아이들은 작고 마른 것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도 남은 밤은 어느 새 여자 아이들이 접시 채 가져가서 다 먹어버렸다. 물론 나는 미리 서랍에 챙겨놓았던 것을 아이들 보는 앞에서 당당히 까먹었다.

  저녁에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아이들한테 장난칠 줄 알았다.”며 나를 타박하였다. 어떻든 오늘 아이들과 함께 먹은 밤은 정말 타박하였다. (06. 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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