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어설픈 벌주기

늙은어린왕자 2007. 5. 25. 14:06

 

어설픈 벌주기

 

  중간고사도 끝났고 며칠 있으면 수학여행이라 그런지 교실은 활기로 넘친다. 게다가 5월에는 어린이날을 비롯해서 ‘무슨 날’도 많은데다가 학교 행사도 많아서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시간 나면 공부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요즘이다.

  이런 어수선함과 더불어 아이들은 3-4월 동안 숨기고 있던 본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교실에서 공놀이를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몰래 하다가 교실천장을 뻥 뚫어 놓는가 하면 내 책상 유리를 박살내놓고 깬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교과서나 준비물을 안 챙기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공부 시간에도 거리낌 없이 떠든다. 담당구역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갔다고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더러 전화가 오기도 한다.

  “이 선생님은 애들을 너무 풀어놓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선생님 겁을 안 내죠. 애들 좀 잡으세요.”

  우리 반에 수업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충고를 하기도 한다. 아이들 주위에 쳐 놓은 울타리가 좀 넓을 뿐이지 내가 아이들을 마냥 풀어놓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솔직히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한 번 정도는 강한 인상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하나 생겼다.

  얼마 전 사회 시간이었다. 수업에 활용할 조사 숙제를 냈는데 검사를 해보니 34명 가운데 12명이 해오지 않았다. 서너 명도 아니고 열두 명이라면 좀 많은 편이다. 게다가 최근에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어서 감정이 좀 상해 있던 터였다.

  ‘이 녀석들이 진짜 나를 물로 보는 건가? 잘 됐다. 오늘 맛 좀 봐라.’

  우선 안 해온 아이들 이름을 경영록에 기록하고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숙제 안 해온 사람 모두 일어섯! 자기 의자 들고 뒤에 서 있어.”

  아이들은 다소 의외라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 학년 들어서 처음 있는 일이라 모두들 놀란 표정이었다. 교실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뭐하노. 빨리 안 나가고?”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듯 아이들은 하나 둘 뒤로 나갔다. 의자를 들면서도 멀뚱멀뚱한 표정들이다.

  아이들이 벌을 서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한 5분 남짓 지났을까. 벌 받는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팔이 아파오는지 몸도 이리저리 뒤척였다. 얼굴이 벌게진 아이도 있었다.

  낑낑거리며 서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자업자득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좀 안 돼 보이기도 했다. 하기 싫어서 안한 아이도 있겠지만 시간이 없거나 집에 자료가 없어서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쑥 동정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벌주기가 숙제뿐만 아니라 어수선한 아이들 생활에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해서 쉽게 물러서면 안 된다는 냉정한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할까 싶어 이런 저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이해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마음이 약한 건지 사리분별이 뚜렷하지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이렇다.

  ‘그래, 요즘 아이들 얼마나 바쁘겠노.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교육에 어른들의 잔소리에 놀 시간도 제대로 없을텐데….’

  ‘태산명동 서일필’이라더니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 숙제 검사를 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벌을 주문할 때에 비하면 너무 밋밋하고 싱거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음의 결정을 한 뒤 앉아 있는 아이들한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제 벌 서는 아이들 들어오라고 할까?”

  앉아 있는 아이들도 군데군데 빈자리가 허전했을까. 아니면 자기네들끼리 이심전심이라도 통했던 것일까. 속이 뻔히 보이는 내 물음에 이구동성으로 “예”하고 대답을 했다. 그 대답소리가 벌 서는 아이들에게 복음처럼 들렸는지 찡그리던 표정들이 금방 밝아졌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자. 앉아 있는 사람이 벌서고 있는 아이 가운데 데리고 오고 싶은 사람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와라. 그리고 숙제 안한 사람은 그 친구 자료를 보고 정리를 하자.”

  사건 흐름이 너무 급작스럽게 바뀐 탓일까. 처음에는 선뜻 데려오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이 없더니 강훈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강훈이는 강원이를 데리고 오겠단다. 왜냐고 하니 서강훈-서강원 이름이 비슷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한 명씩 짝을 지으면서 데리고 오니 이유도 가지가지다. 상민이는 자선이를 데리고 왔는데, 얼마 전 다리 기브스를 했을 때 가방을 자주 들어주었다고 한다. 지난 번 학급회의 때도 그것 때문에 선행아동으로 추천을 하더니 두고두고 써먹는다 싶었다.

  덩치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작은 동민이는 마음 착한 여학생인 정은이가 데리고 왔는데 사람 보다 의자가 더 커 보여서 애처로웠다고 한다. 또 표정 연기를 잘 하는 주현이는 얼굴 표정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마음 여린 창용이는 울먹이고 있다는 까닭으로 들어가게 됐다. 창용이를 보니 진짜 울먹이고 있었다. 그 밖에 땀을 흘려서, 짝지이기 때문에 들어가기도 해서 벌주기는 막이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운 의자를 들고 낑낑거리던 아이들이 짝을 지어 들어가서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 애들은 애들이다 싶었다. 결국 ‘로또’ 같은 자유를 얻은 아이들을 비롯해서 모든 아이들이 함께 참여해서 수업을 무난하게 마쳤다.

  어설픈 벌주기가 아이들 마음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또한 사랑과 전쟁의 갈림길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하게 될 것이다.

  지난 경험을 둘러보면 벌이란 건 일단 한 번 시작하면 계속 주게 된다. 또 강도는 점점 세어진다. 그러다 보면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예기치 않았던 감정의 골이 깊게 패일 수도 있다. 이번에 이 정도로 마무리한 게 어쩌면 나한테나 아이들한테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2007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