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고 다 켜주나봐
장마 끝무렵이다. 아직 방학은 몇 일 남았고, 교실은 무덥다. 찌는 듯한 온도와 습도, 아이들 수십 명의 몸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교실에 가득하다. 문을 열어도, 천장에 달린 네 대의 선풍기를 틀어도 등 뒤로 땀이 촉촉하게 밴다. 유달리 더위에 약한 나는 일 년 중에서 이맘 때가 가장 힘들다. 특히 높은 습도는 정말 이기기 힘들다. 겨울에도 습도가 높은 날이면 몸에 땀이 배는 체질 때문이다.
방학을 2주일 앞둔 월요일(7일), 드디어 학교에서 에어컨을 켜준다고 발표를 했다. 발표가 있기 몇 일 전부터 행정실장한테 계속 "더워서 못 살겠다"고 팝업을 보냈는데 그것이 통했던 것일까? 아니면 기상청에서 폭염주의보를 예보한 때문일까? 어떻든 내겐 단비같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켜는 시각이 문제다. 요즘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다 보니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학년별로 시간대를 정해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학년은 1-3교시, 고학년은 4-6교시에 켜는 것이다. 우리 6학년은 11시 10분부터 1시 10분까지 두 시간이다. 6교시가 있는 날은 2시부터 40분간 더 켤 수 있도록 했다. 단, 최저희망온도는 교실에서 조절할 수 없고, 학교에서 24도로 정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에너지 문제가 워낙 심각해서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칠판에 '에어컨 켜는 시각 : 11시 10분'이라고 적어두고 내가 없더라도 시간이 되면 켜라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렇게 몇 일 동안 잘 지냈다. 확실히 에어컨은 돈 값을 했다. 선풍기 네 대만 돌릴 때는 더운 바람이 돌고 돌기만 해서 덥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에어컨을 켜니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하지만 11시 10분 이전이 문제였다. 이 시간을 위해서 두 시간 반을 찜통 속에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그럭저럭 잘 참는 것 같았는데 더위를 못 참는 내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전담실로 수업하러 가고 나면 혼자 있으면서도 슬쩍 슬쩍 틀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을 때 일찍 켜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정확한 아이들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10시 50분 쯤 되었을 때 "와이리 덥노" 하면서 에어컨을 슬쩍 켰더니 개념 없는 몇몇 아이들은 좋아라 환영했지만 또 다른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 아직 켤 시간이 아닌데 왜 켜요?"
하고 눈망울도 말똥말똥하게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두렵던지.
아이들 눈빛과 관련된 다른 일도 있다. 보름 쯤 전에 에너지를 절약하자며
"선생님은 복도가 훤한데도 불을 켜 놓은 거 보면 무조건 끈다. 하루에도 백 번 넘게 불을 끈다."
고 은근히 자랑처럼 강조하다가 바로 그 날 칠판등을 밤새도록 켜놓고 가버렸던 일이 있었다. 이튿날 아이들한테
"선생님은 에너지 절약 강조하시더니 밤새 불을 켜놓고 뭐 하는 거예요?"
하고 면박을 들었다.
방학을 몇 일 앞두고 날씨는 점점 더 더워졌다. 아무래도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만 쌓여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한테도 별로 좋은 영향을 못미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소한 2교시가 끝나는 10시 40분에는 에어컨을 켜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눈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눈빛들을 요리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찾은 묘수가 다음 방법이다.
수업이 끝날무렵 아이들이 내가 지시한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을 때 재빨리 에어컨 가동 버튼을 눌러놓고 바람문이 열리는 동안 교실 가운데로 얼른 이동을 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아이들이 문제 푸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어, 선생님. 에어컨이 켜졌어요."
이 때를 놓칠세랴. 얼른 받아쳤다.
"어, 그러네? 오늘 너무 덥다고 학교에서 다 켜 주나봐."
그러니 한 녀석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학교에서 한 턱 쓰네요."
아이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30분 일찍 켜진 에어컨을 받아들였다. 바람은 시원했지만 아이들 눈치 보느라 속마음은 더 더웠다.
저학년 선생님들한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그들도 똑 같은 경험을 했다며 재미있어했다. 끌 시간이 됐는데 안끄면 시간이 되었는데 안 끈다고 아이들이 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럼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겠네. 전원 버튼을 누르는 척 하며 '와 이리 안 꺼지노' 하고, 아이들한테 '야들아, 오늘은 덥다고 학교에서 안꺼지게 했나봐.' 이렇게 말이야."
날이 덥다 보니 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20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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