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에어컨 켜기 작전(고친글)

늙은어린왕자 2008. 9. 19. 18:05

에어컨 켜기 작전(고친 글)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다. 가을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운동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온 몸9이 땀에 젖는다. 교실에 들어와서 창문을 열어놓고 조금만 참고 있으면 제법 시원한데도 유달리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에어컨 버튼부터 누른다. 물론 아이들이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켜 주는 모양새를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아이들이 고맙다.

  더위에 헉헉거리다 보니 지난 칠월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장마 끝 무렵이라 교실은 무더웠다. 찌는 듯한 온도와 습도, 아이들 수십 명의 몸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교실에 가득했다. 문을 열어도, 천장에 달린 선풍기를 틀어도 등 뒤로 땀이 촉촉하게 뱄다. 나는 일 년 가운데 이맘 때가 가장 힘들다. 
  방학이 2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학교에서 에어컨을 켜준다고 발표를 했다. 그런데 켜는 시각이 문제였다.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학년별로 시간대를 정해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학년은 1-3교시, 고학년은 4-6교시에 켜는 것이다. 우리 6학년은 11시 10분부터 1시 10분까지 두 시간이다. 6교시가 있는 날은 2시부터 40분간 더 켤 수 있도록 했다. 단, 최저희망온도는 교실에서 조절할 수 없고, 학교에서 24℃로 정했다.

  칠판에 '에어컨 켜는 시각 : 11시 10분'이라고 적어두고 내가 없더라도 시간이 되면 켜라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렇게 몇 일 동안 잘 지냈다.

  확실히 에어컨은 돈 값을 했다. 선풍기 네 대만 돌릴 때는 더운 바람이 돌고 돌아서 덥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에어컨을 켜니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문제는 11시 10분 이전이었다. 두 시간 반을 찜통 속에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그럭저럭 참는 것 같았는데 더위를 못 참는 내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전담실로 수업하러 가고 나면 혼자 있으면서도 몰래 켜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을 때 일찍 켜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의 눈 때문이다. 어느 날 10시 50분 쯤 되었을 때 ‘와이리 덥노!’ 하면서 에어컨을 켰더니 바로 지적을 당했다.

  “선생님, 아직 켤 시간이 아닌데 왜 켜요?”

  평소 에너지 절약을 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나였기에 핵심을 콕 찌르는 이 말 한마디 앞에서 바로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이 어찌나 화끈거리던지.

  아침부터 실내온도가 34~5도를 오르내리던 어느 날, 아무래도 목숨을 이어가려면 에어컨의 힘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 10시 40분에는 켜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송골매같은 아이들의 눈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매서운 눈빛들을 요리할 수 있을까.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2교시 수업이 끝날 무렵, 아이들이 내가 지시한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을 때 재빨리 에어컨 가동 버튼을 눌렀다. 바람문이 열리는 동안 얼른 발걸음을 옮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문제 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선생님. 에어컨이 켜졌어요.”

  눈치 빠른 아이들이 반응을 보이자 너도 나도 천장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왜 또 에어컨을 일찍 켰어요?”

  이런 김 새는 반응이 먼저 나오지 않은 게 반가웠다. 그러나 아주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해석(?)해주었다.

  “그러네? 오늘 날씨가 너무 덥다고 학교에서 다 켜 주나봐.”

  그랬더니 한 녀석이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야, 오늘 학교에서 한 턱 쓰네요.”

  “그러게 말이야. 살다 보니 좋은 일도 많이 생기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의심 없이 30분 일찍 켜진 에어컨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 날 조금 더 시원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008년 9월 3일)  주간' 교육희망' 9월 8일자에 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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