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6월 11일 - 정훈이 필통

늙은어린왕자 2010. 6. 16. 15:45

6월 11일

정훈이 필통


  도덕 시간에 수행평가지를 푸는데 정훈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도덕책 대신 과학책, 쓰기책, 읽기책이 뒤엉켜 있었다. 읽기는 오늘 시간표에 들지도 않았다. 정훈이 책상만 보면 도덕 시간인지 국어시간인지 과학시간인지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렇다.

  “정훈아, 공부 시간에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문제가 있으면 풀어야 하고 쓸 것은 써야 해. 지금은 문제 푸는 시간이야.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이런 잔소리를 하며 등짝이라도 한 대 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벌써 정훈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훈이는 조그만 야단에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운다. 울어도 하염없이 운다. 덩치는 또래 3학년 아이들 보다 훨씬 크고 친구들과 놀기도 잘 하지만 울 때는 아기가 된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니 함께 생활한 지 세 달이 되다보니 그 찡한 울음소리가 정훈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울음번역기가 있다면 아마 이런 말이었을 것 같다.

  “선생님, 저는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가져오기 싫어서 안 가져오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하려고 하면, 가져오려고 하면 세상은 시간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하늘로 떠올라요. 저기 저 땅에 내려앉아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데 저는 자꾸 떠올라요. 선생님, 야단치지 말고 제 손을 잡아주세요.”

  내가 다가서자 정훈이가 책상을 뒤지며 뭔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연필을 찾는 게 틀림없었지만 없는 연필이 나올 리 없다.

  “정훈아, 또 연필 찾나? 니한테 가는 연필은 모두 발이 달리나 보다.”

  아이들에게 남는 연필이 있는 지 물어보니 고맙게도 규리가 연필을 하나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청소시간에 주워 깎아놓은 연필이 생각나서 그걸로 주었다. 정훈이는 연필을 마지못해 받아들고 쓰는 시늉을 했다. 일찌감치 성장이 멈춘 아이처럼 제 물건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정훈이를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교탁을 뒤져서 주워놓은 필통과 연필, 지우개를 꺼냈다. 또 선물 주려고 사 놓은 자, 삼색 볼펜, 검은 볼펜도 하나씩 꺼내 모두 필통에 넣었다. 좀 낡긴 했지만 있을만한 건 다 들어있는 어엿한 필통이 되었다.

  “이거 지금부터 정훈이 필통이다. 잘 봐둬.”

  아이들에게 필통을 보여주고 정훈이에게 건네주었다. 정훈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받았다. 아이들은 기쁨 반 부러움 반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탕 한 개라도 이유 없이 누구에게 주면 난리가 나는 아이들이지만 정훈이에게 필통 준다고 따지는 아이는 없었다.

  “선생님은 정훈이 아빠나 삼촌 같아요.”

  “혹시 이정호가 아니라 강정호 아니에요?”

  몇몇 여학생들 이야기에 아이들이 웃었다.

  “와 좋겠다. 나도 연필 안 가져오고 필통도 안 가져오고 싶다.”

  구완이의 우스개 소리에 아이들이 또 한 번 웃었다.

  정훈이가 기분이 좋았던 지 오후에 남아 수학문제를 모두 다 풀고 갔다. 매겨보니 틀린 것 보다 맞은 게 훨씬 많았다. 역시 정훈이는 잘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오늘 정훈이에게 준 필통이 낡아서 안타까웠는지 몇몇 아이들이 집에 있는 필통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좋은 아이들이죠?

 

**2012년 9월 16일 새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