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목요일 오후에 눈이 내리다.
바위치기
오후에 교장실에 들러 연도별 컴퓨터 현황을 알려드리고 학교 예산 짤 때 참고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마음에 넣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교장선생님, 천체망원경 예산 없애지 않았으면 합니다."
"얼마 잡았노?"
"200만원입니다."
"그 돈이면 컴퓨터 몇 대 살 수 있노?"
"두 대 살 수 있습니다."
"잘 하면 세 대 살 수 있겠네. 그러면 컴퓨터 사는 게 더 낫지 않나?"
나는 준비해간 자료를 보여주었다. 새 교육과정 5학년 1학기 과학 진도표였다.
"교장선생님, 새 교육과정에서부터는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해보자'는 차시가 나옵니다."
"아니, 말고. 그 한 시간 공부를 위해서 200만원 투자하는 것 보다 내내 쓸 수 있는 컴퓨터가 더 효율적이지 않나?"
더 할 말이 없었다. 지난해 예산 청구했을 때 컴퓨터를 다섯 대 잡아두었는데 다 삭제하고 고작 한 대만 남긴 장본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 천체망원경도 그 때 이미 삭제됐 예산인데 안될 줄 알면서 올 해 다시 청구한 것이다.
주제를 바꾸었다.
"교장선생님, 우리 반에서 이번에 학급문집을 만드는데 지원해주실 생각이 없습니까?"
"얼만데?"
"20~30만원 쯤 됩니다. 작년에는 지원받았거든요."
"올 해는 예산 집행 다 끝났다. 새 학기에 6학년들이 졸업문집 한다고 해서 잡아두라고 한 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사정을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까."
"3학년 다 만드나?"
"아니오. 우리 반만 만듭니다."
"3학년 다 하면 몰라도 한 반만 지원하면 형평에 맞나?"
"다 하고 싶어도 선생님들이 문집 만드는 걸 어려워해서요."
"그렇다고 한 반만 지원해주기는 어렵다. 갑자기 급식소 공사도 터진 게 있어서 예산도 빠듯하고."
결국 원하는 대답은 한 마디도 못 듣고 교장실을 나왔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어서인지 담담했다.
교실로 올라가는데 도서실을 담당하는 옆 반 선생님이 하소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모레가 봄방학인데 난데 없이 도서실에 책을 500만원어치나 사라고 해서 미치겠다. 목록 정해서 'OO도서'에 넘기려니 머리가 아프다." ('OO도서'는 학교에 책 대주는 대행업소다.)
선생님 말로는 예산이 남아서 책이라도 사라고 한단다. 아이들 보는 책 사는 건 좋은 일이지만 교실 한 칸 크기 도서실에는 책 넣을 곳이 없어서 교실로 분산해둔 상태다. 풍문으로는 일부 목적사업비 포함해서 예산이 1억 가까이 남았다는 소리도 들린다. 오랜만에 기분좋게 하얀 눈은 내리는데 속은 왜 이리 뒤숭숭할꼬. 문집은 몰라도 천체망원경은 아쉽다. 천문교육에 힘쏟고 있는 나로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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