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토요일 구름 조금
때늦은 감자 심기
어제 미술 시간에 민서가 가져온 감자 두 개를 남겨두었다. 크기가 작고 겉보기에도 쪼글쪼글한데다 손끝으로 누르면 마치 삶은 감자처럼 말랑말랑한 느낌이 드는 감자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도장으로 파기에는 적당하지 않아보였다. 반찬으로 해 먹기는 더더욱 어렵겠다 싶어서 버리려는데 눈구멍에 새싹이 조금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심는 철은 지났지만 버리기 전에 한 번 심어나 보자는 뜻에서 민서한테 허락받고 남겨두었던 것이다.
“선생님, 이거 뭐하시려고요?”
“설마 반찬 해 드시려고 자르는 건 아니지요?”
첫 시간 마치고 감자를 칼로 쪼개고 있으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설마 이걸 반찬 해먹겠니? 작고 쪼글쪼글하고 말랑말랑해서 말야.”
“근데 왜 자르고 있는 거예요?”
“버리기 전에 심어보려고.”
아이들이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 숫자를 적당히 반으로 나뉘도록 잘랐더니 다행히 속은 썩지 않았다. 오히려 생생한 감자보다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나오는 걸로 보아서 잘 심으면 싹이 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소독해야 하는데 재가 없나?”
“재가 뭐예요?”
“재가 뭐긴 재지. 나무나 지푸라기 태우면 남는 거. 재를 여기 바르면 소독이 되는데.”
아직 아이들은 재가 얼마나 강력한 살균, 방부 역할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재로 그걸 소독한다고요?”
“그럼, 사람도 피부가 칼에 베이면 소독약을 바르잖아? 감자도 자른 곳에 재를 발라두면 잘 썩지도 않고 나쁜 균도 다 죽어.”
내 설명에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푸라기 태운 재가 좋긴 한데. 요즘 지푸라기가 있을 리는 없고. 이게 낫겠다.”
태워서 재 만들 만한 것을 찾다 보니 재생용지가 눈에 띄었다. 하얀 색 종이보다는 재생용지를 쓰는 게 자연한테는 죄를 덜 짓겠거니 싶은 마음에 누런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걸 여기서 태우려고요?”
“아니, 밖으로 나갈 거야. 따라 갈 사람은 가자.”
뒤뜰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남자 아이들 예닐곱 명이 우르르 따라나섰다. 평소에 만화에 푹 빠져있던 성윤이와 시현이가 앞장서고 현민이와 동협이, 현수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뒤따랐다.
뒤뜰 사택 앞마당에서 종이를 태웠더니 연기가 제법 올라갔다. 누가 보면 불장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멘트 바닥에서 종이 몇 장 태운다고 전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불씨가 완전히 꺼질 때까지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이 모습을 지켜봤다.
“자, 이제 재를 손으로 비벼서 자른 곳에 발라라.”
내가 시범을 보이자 아이들도 재를 손에 묻혀 자른 감자 표면에 발랐다. 곧 손가락에 시커먼 먹물이 들었다.
“선생님 현수 보세요. 전부 시커멓게 발랐어요.”
재 바르는 게 재미있었는지 현수는 누런 껍질까지 시커멓게 발라놓았다.
이제 행정실 직원에게 부탁하여 긴 화분을 하나 받았다. 언제 왔는지 여학생들도 몇 명 와서 화분에 흙 채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에게 감자 씨앗을 구덩이에 넣도록 하고 흙을 덮었다. 화분을 교실 창가로 옮기고 물을 한 번 주고는 모든 일을 끝냈다.
원래 씨감자는 3월 말이나 4월 초에 심어야 하는데 지금이 5월 중순이니 한참 늦다. 그것도 씨감자가 아니라 반찬에 쓰다가 남은 감자라서 큰 기대는 안 하는데 그래도 싹이 나 준다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지나다니면서 감자 심은 화분을 보면 ‘감자야 잘 자라라’고 말해줘. 그러면 싹이 잘 틀 것 같아. 식물도 칭찬해주면 잘 자란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물은 감자 주인인 민서가 주겠다고 한다. 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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