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5월 19일 - 등굣길 교문 풍경

늙은어린왕자 2011. 5. 20. 19:35

**이 글은 보통 때 보다 길게 썼습니다. 교문에서 약 40분 동안 교통지도를 하면서 있었던 일을 썼는데요, 이런 글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쓴다고 해서 '사생글쓰기'라고 합니다. 내용이 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사생 글쓰기를 한 번 해보세요. 글 쓰는 힘이 커진답니다. 단, 이런 글을 쓰려면 반드시 메모를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들고 있던 신문지에 꼼꼼하게 메모하고 그걸 보며 글을 썼습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절대 믿을 수 없으니까요.

 

5월 19일 목요일
등굣길 교문 풍경

 

  오늘부터 이틀 동안 교문에서 교통 지도를 하게 됐다. 평소보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시계는 벌써 8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해서중 쪽 횡단보도와 시민의 종에서 우리학교로 건너오는 삼거리에는 시청에서 파견한 할머니 세 분이 벌써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초등학생들 보다 먼저 등교하는 중학생들이 삼삼오오 지나가고 사이사이로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하나 둘 교문으로 들어섰다. 옆 반 오선이와 우리 반 수민이도 그 속에 끼어서 들어왔다.
  “어제 축구 망했어요.”
  어제 내가 출장간 사이 합동체육 시간에 축구 시합을 한 모양이었다. 오선이는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축구 했어? 내가 티볼 하라고 써놨는데.”
  “티볼 안 했어요.”
  수민이가 검은 봉지에 든 공을 튕기며 대답하고는 오선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한별이가 혼자 털레털레 걸어왔다.
  “한별아, 왜 혼자 오노? 다리 괜찮나?”
  “예.”
  “조심해서 다녀라.”
  2년 전 다리를 크게 다쳐 몇 번이나 수술을 한 한별이는 표정 없이 볼만 몇 번 실룩이더니 들어갔다. 곧이어 전교회장인 지수가 다가왔다.
  “지수야, 오늘이나 내일 컴퓨터 갈거다. 엄마한테 연락해놔라.”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갈 길을 갔다. 지수네는 이번에 교육청에서 저소득층 가정에 주는 컴퓨터를 한 대 받게 된다.
  학교 시계를 힐끗 보니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관 위에 우뚝 달려 있는 시계는 지름이 1m 정도 되는 큰 시계여서 교문에서도 잘 보였다. 하지만 늘 4~5분씩 일찍 가는 게 흠이다.
  잠시 뒤 우리 반 성정이와 3반 가연이가 들어섰다. 성정이는 반갑게 인사하는데 지난 해 우리 반이었던 가연이는 웬일인지 인사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박가연! 모른 체 하고 들어갈 거야? 장난 전화 그만 하시지?”
  이 말에 가연이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했거든요?”
  “힝, 내 전화기에 분명히 ‘박가연 꼬마’가 떴어.”
  가연이는 모른 체 하고 들어갔다. 며칠 전 저녁에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박가연 꼬마’라는 이름이 떴는데 웃음소리만 몇 번 나더니 끊겨버렸다. 가연이는 그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곧 옆 반 수연이가 싱긋 웃으며 들어가고 우리 반 (김)현민이 다리를 절룩이며 따라 들어왔다.
  “현민아, 다리 왜 그래?”  “어제요, 다리 아파서 병원 갔다 왔어요.”
  광주에서 전학 온 지 두 달 밖에 안 된 현민이는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너, 어제 그제 잡기 놀이 한다고 여기 저기 뛰어다녀서 그런 거 아냐?”
  “어제요? 어제 안 했어요.” 
  녀석은 어제 안 했다는 말을 강조하며 불리한 대답을 피하고는 들어갔다.
  “이정호쌤! 오늘 여자 대 남자 축구해요!”
  현민이한테 잠시 눈길을 주는 사이 어느 새 우리 반 세진이와 (정)현민이, 현수가 곁에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째 시간이 체육이다. 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어주자 녀석들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수업 일정표를 칠판 옆에 붙여 놓았는데도 아이들은 죽어나 사나 축구 밖에 없다.
  서중 쪽 소나무 밭 사이로 우리 반 수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생각에 잠긴 듯 혼자서 땅을 바라보며 소나무 사이사이로 걸어오더니 문득 교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질문부터 했다.
  “오늘 체육 해?”
  선생님을 친구나 엄마(?)와 구분하지 않는 수지는 반말을 자주 한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무리하게 고치려 들면 행여나 말문을 닫아버릴까 봐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다.
  “하지.”
  “뭐 해?”
  “달리기나 열심히 하지 뭐.”
  능청스런 내 대답에 수지가 입을 삐죽거리며 들어갔다.
  시계는 벌써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3분. 예전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때는 시간이 그렇게도 길게 느껴지더니 아이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서 있으니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곧 우리 반 은준이와 3반 민석이가 함께 왔다. 은준이는 옷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그것도 벗겨질까봐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은준아, 춥지도 않은데 모자 왜 쓰고 있노?”
  “뭐, 사정이 있어요.”
  “민석아, 모자 벗겨봐라.”
  민석이와 주변 아이들 몇몇이 달려들어 모자를 벗기려 했지만 은준이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리며 피했다. 해도 안 되겠던지 민석이가 까닭을 말했다.
  “은준이 머리 깎은 거 보여주기 싫대요.”
  역시 짐작한 대로였다. 은준이는 겉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알고 보니 미용에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이어서 지난해에 우리 반이었던 규리, 량희, 은서가 말 붙여볼 새도 없이 교문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삼거리 쪽에 학원 차가 잠깐 서 있더니 스무 명 가까운 아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 반 민서와 미경이도 포함 돼 있었다. 보기엔 차가 작아 보이는데 실내 공간이 넓은 모양이었다.
  “한 줄에 다섯 명씩 앉아요. 근데 늦게 탄 애가 겹쳐 앉아서 모두 열일곱 명이 타고 왔어요.”
  궁금해 하는 나를 위해 민서가 친절하게 까닭을 설명해주었다.
  “근데 미경아, 오늘 체육 들었는데 그렇게 예쁜 구두를 신고 오면 어떡해?”  미경이는 하얀색 꽃 장식 구두를 신고 왔다.
  “엄마가 기침 때문에 병원 간다고 체육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구두 굽 낮거든요!”
  병원 갈 만큼 아프다던 미경이는 씩씩거리며 제 할 말을 다 하고 들어갔다.
  곧이어 우리 반 지상이가 등에 맨 가방을 들썩거리며 뛰어오더니 꾀를 냈다.
  “선생님, 첫 시간에 체육인데 운동장에 있으면 안 돼요?”
  “안 돼. 가방 교실에 놔두고 와야지.”
  지상이는 아무런 대꾸 없이 체념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먼저 들어간 이경이, 민서, 경은이가 운동장 트랙을 따라 뛰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준비운동으로 두 바퀴만 뛰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시키지도 않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뜸을 들이고는 우리 반 희지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희지야, 어제 교실에 아무 일 없었나?”
  “네.”
  희지는 기분이 좋아도 생글, 안 좋아도 생글생글한 표정이다. 희지는 발걸음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만 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이제 교문으로 들어서는 아이들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오히려 직원들이 타고 들어오는 차량 숫자가 더 많아보였다. 오늘 교통지도를 하지 않았으면 나도 이 시간에 슬금슬금 차를 타고 들어왔을 것이다. 아이들보다 먼저 와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면서도 틀을 깨지 못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나는 천성이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또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글을 쓰면서 한 번이라도 나를 되돌아보았으니 이후로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40분이 되자 나사가 한두 개 풀린 느낌을 주는 6학년 남자 아이 다섯 명이 털레털레 걸어왔다. 등교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고 모두들 여유만만이었다.
  “얘들아, 너희들 조금만 늦었으면 지각할 뻔 했다. (사실은 지각이다!) 다음부턴 조금 더 일찍 와라.”
  “예!”
  녀석들은 대답도 설렁설렁 하고는 들어갔다. 운동장으로 느지막이 들어가는 녀석들 뒷모습을 보니 마치 노래라도 한 곡 나올 분위기였다.
  이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아침 교통 지도를 끝냈다. 해반천 쪽 횡단보도에 서 있던 어머니들로부터 깃발과 조끼를 받고 인사를 나눴다. 텅 빈 교문을 들어서는데 운동장에는 어느 새 우리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뛰어놀고 있었다. 체육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