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9월 23일 - 우정 포스터 그리기(스케치)

늙은어린왕자 2011. 9. 27. 12:15

9월 23일 금요일 가끔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 시원하다.
우정 포스터 그리기(스케치)

 

 

  “선생님, 바탕 꼭 해야 해요?”
  “시간 좀만 더 주시면 안 돼요?”
  친구와 우정을 다지는 ‘우정 포스터 그리기’ 행사가 한창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 오전 11시 반부터 거의 세 시간째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느긋한 질문을 쏟아낸다.
  “다 한 사람은 자리에 앉고 아직 다 못한 모둠은 빨리 좀 해 줘.”
  답답한 마음에 잔소리도 하고 부탁도 해보지만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열심히 붓질만 한다.
  현민이, 지상이, 한별이네 모둠은 ‘단체따돌림 낭떠러지의 길’이라는 주제로 열심히 색칠하고 있다. 그러나 색칠한 곳 보다 칠할 곳이 더 많이 보인다.
  “야들아, 시간 없다. 20분밖에 안 남았어.”
  “나눠서 하면 돼요.”
  지상이는 여유만만하다. 그렇지만 같은 모둠 한별이는 이웃 모둠 성윤이를 잡으러 다니기 바쁘다. 함께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말이다.
  “한별이 형이 저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며 찼어요.”
  “내가 언제?”
  둘 다 주의를 받았는데 한별이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고는 자리에 앉는다.
  (안)유진이, 성정이, 이경이 모둠도 한가해보이긴 마찬가지다. 이제 색칠에 들어간 듯 도화지는 연필 자국만 가득하다.
  “언제 다 할래?”
  “오늘요.”
  이경이는 능청맞게 대답하고는 붓질을 계속한다.
  “그렇게 한가하게 대답할 여유가 어딨노?”  “선생님이 세로로 해라 해가지고 가로로 한 거 다 지우고 새로 했잖아요!”
  얼굴도 안 돌리고 말없이 붓만 놀리던 유진이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하다.
  “내가 세로로 그리라고 다섯 번도 더 얘기했다. 어이그.”
  “알았으니까 빨리 저쪽으로 가세요.”
  싸늘한 대답을 뒤로 하고 수지, 진하, 민지 모둠으로 가니 날선 질문이 들어온다.
  “바탕 왜 칠하라고 해요?”
  “바탕 때문에 망쳤잖아요.”
  진하의 뜬금없는 질문에 민지가 거든다.
  “바탕이 없으면 그림이 되나?”
  차라리 시간 없어서 못 칠하겠다고 하는 게 맞지 어딜 공격하느냐는 듯이 한 방 날렸더니 쑥 들어간다.
  “선생님, 우리 거 뽑아주세요. 저 상 많이 못 받아봤어요.”
  “맞다. 나도 2학년 땐가? 그 때 받고 안 받은 거 같다.”
  민지와 진하는 상 탄 내력을 둘러대며 은근히 뽑히기를 원하는 눈치다. 이럴 땐 만족스럽게 대답해줄 방법이 없다.
  경희, 민경, 민서 모둠은 색칠 도구를 챙기고 있다.
  “우리 다 했어요!”
  경희가 자신 있게 말하자 옆 모둠 민지가 그림을 쳐다보더니 한 마디 한다.
  “바탕 해야지!”
  민서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한테 묻는다.
  “바탕도 해야 돼요?”
  “그럼.”
  민서는 더 묻지 않고 바로 붓을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도 수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왼 손에 잡은 붓만 부지런히 놀린다. 뭔가 감정이 있는 걸까?
  채미, 경은이, 희지 모둠은 바탕만 남았다. 남은 모둠 가운데 가장 먼저 끝날 듯하다.
  “학원 갈 시간 됐어요. 지금 가야 하는데.”
  “아직 마칠 시간 멀었어.”
  내 말에 시계를 힐끗 본 경은이는 다시 부지런히 붓질을 한다.
  모둠을 둘러보는 동안 그림을 다 그린 남학생 몇 명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난치기 바쁘다. 행사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내 책상 위에 놓인 작품 몇 개를 둘러보며 의문을 가져본다. 학교에서 하는 행사라 마지못해 하지만 끼리끼리 모여 포스터 한 장 그리는 게 우정을 다지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시간에 쫓기고 내 잔소리 들어가며 그리는 그림이 오히려 우정을 쌓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잠시 뒤면 학년 선생님들이 모여 그림 심사를 할 것이다. 수십 작품 가운데 세 편을 골라 최우수, 우수, 장려상을 가릴 것이다. 최우수상을 받는 아이들은 방송조회 때 이름이 불리고 학교 신문에도 이름이 날 것이다. 또 우수작품이란 꼬리표를 달고 현관에도 전시되겠지.
  상을 받고 이름이 나는 아이들이야 기분은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뭔가. 세 시간 동안 열심히 그린 작품이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종이조각이라면? 차라리 그림 실력 겨루기라고 이름을 붙였으면 아쉬움이 덜 컸을 텐데 말이다.
  어느덧 마치는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마무리가 덜 된 모둠은 쉴 새 없이 붓을 놀리고 있고, 다 한 아이들은 가방을 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