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10월 14일 - 문집 만들기

늙은어린왕자 2011. 10. 19. 23:50

10월 14일 금요일 가을비 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림
문집 만들기

 

 

  오늘은 꼭 문집을 내야겠다고 마음먹고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왔다. 편집해 놓은 글을 복사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복사기를 주로 쓰는 낮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서다.
  행정실에 가서 복사용지를 두툼하게 챙겨서 3층으로 올라오니 이른 시간인데도 아이들이 많이 와 있었다.
  “어? 선생님, 왜 이리 일찍 왔어요?”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항상 일찍 오는데?”
  “에이, 거짓말!”
  누가 들어도 새빨간 거짓말이 아이들한테 통할 리 없었다. 
  “선생님은 늘 늦게 오시잖아요.”
  “지각도 하시면서.”
  우리 반도 아니면서 어쩌면 저렇게 나를 잘 알까. 아이들 눈은 못 속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연구실에 들어섰다.
  2학기 들어 새로 단장한 연구실에는 새 복사기도 들어왔다. 9월에 생각주머니를 만들 땐 1층에 있는 중고 복사기에서 복사하는 바람에 인쇄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시험 인쇄를 해보니 아주 깨끗하게 잘 나왔다.
  복사기를 돌려놓고 다시 1층 자료실로 내려갔다. 여기선 표지와 차례를 칼라로 인쇄해야 한다. 그런데 프린트기에 잉크가 없었다. 다시 교실로 갔다가 잉크를 가져와서 넣었다. 이번 표지는 특히 칼라사진이 많이 들어가서 색깔이 선명하게 나와야 되는데 제법 괜찮게 나왔다.
  인쇄한 표지와 차례를 들고 교실로 연구실에 가니 제법 복사가 되어 있었다. 우선 나온 것부터 교실에 갖다 놓고 5학년 3반에 가서 제본기를 가져왔다. 5학년 3반 선생님은 학교 제본기로 여러 가지 평가지를 자주 제본한다. 그래서 늘 제본기를 곁에 두고 있다.
  다시 연구실에 가서 복사하다보니 벌써 수업 시간이 됐다. 한 시간 일찍 와도 우왕좌왕하며 여기저기 오가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갔다. 첫 시간은 연극 수업이어서 강사님이 기다리고 있는 문화체험실로 아이들을 보냈다.
  1교시 수업이 절반쯤 지나갈 무렵 모든 복사를 끝냈다. 복사한 것을 교실로 들고 가서 쌓아놓고 아이들이 올 동안 모두 칼로 반 토막 냈다. 겉표지를 쓸 OHP 투명 용지도 40장 준비해서 반 토막 내고 제본 준비를 마쳤다. 이제 한 부씩 챙겨서 제본기로 구멍을 뚫고 스프링으로 제본하면 문집이 만들어진다.
  “뭐하시는 거예요?”
  “이게 책 제목이에요?”
  “와! 제목이 ‘하마 얼굴 선생님’이다. 진짜 어울리네.”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책상 위에 벌여 놓은 것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뭐긴 뭐야. 문집 만드는 거지. 그리고 책 제목은 수지 글 제목을 따온 거야. 이렇게 내가 망가지는 제목을 써야 너희들이 좋아하지 않겠니?”
  “그럼요.”
  “마음에 들어요.”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내 예상이 족집게처럼 맞아떨어졌다.
  사실 어제 오후까지도 문집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정하지 못했다. 생각주머니 공책에 쓴 짧은 글모음은 ‘생각주머니’라고 이름을 붙여도 어울렸다. 그런데 겪은 일 쓰기를 그대로 제목으로 쓰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글 제목 가운데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고르게 되었다.
  제본은 넷째 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A4용지 절반 크기의 55쪽 짜리 작은 문집이지만 어엿한 책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한테 한 권씩 나눠주고 읽어보게 하였다. 또 집에 가서 부모님들께도 보여드리도록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컴퓨터로 편집하고, 오늘 네 시간 남짓 복사와 제본 작업을 했으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그러나 가장 힘을 많이 쓴 사람은 바로 아이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난 한 학기 내내 글을 썼기 때문이다. 2학기가 끝날 무렵, 다시 이렇게 예쁜 문집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