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11월 21일 - 금지곡(?) 부르기

늙은어린왕자 2011. 11. 26. 00:06

11월 21일 월요일 맑고 춥다
금지곡(?) 부르기

 

  선생님 우리선생님 이제 그만 야단치세요 네?
  우리들은 뭐든지 다 아는 어른이 아니잖아요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할 얘기가 많은걸요
  떠든다고 지우개처럼 이제 그만 탁탁 터세요 야야야야
  우리들은 개구쟁이지만 마음만은 밝잖아요 ♬
  <김인보 작사·작곡 「우리이야기」에서>

 

  학예회를 끝내고 나니 벌써 일 년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곧 있을 기말고사까지 치르고 나면 더욱 이런 느낌이 들 것이다. 때마침 어제부터 날씨도 추워져서 연말 분위기를 부추긴다.
  올 한 해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활동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래 부르기이다. 꽉 짜인 시간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데는 노래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아침 시간이나 쉬는 시간, 수업이 일찍 끝나고 짬이 생길 때 노래 한 자락 흥얼거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이것을 실천하려고 학년 초부터 여러 가지 노래파일도 모으고 악보도 구해놓았다. 그리고 3년 전에 새로 산 기타도 가끔 들고 다니며 호들갑을 떨곤 했다. 한마디로 준비는 완벽하게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한 해가 가는 지금, 구해놓은 노래파일은 복잡한 폴더 속에 숨어서 클릭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악보집은 책꽂이 한 귀퉁이에서 먼지만 잔뜩 뒤집어쓴 채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호들갑스럽게 들고 다니던 기타는 아무런 쓰임도 없이 나를 꾸며주는 장식 노릇만 한 채 방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무슨 일로 그리 바빴을까? 중요하고 급한 일이 일 년 내내 이어진 것도 아닌데 어떤 대단한 일을 하느라고 아이들과 노래 한 자락 부르지 못할 만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일까? 차가운 바람에 잎들을 우수수 날려 보내며 겨울 준비를 하는 나무들을 보고서야 이런 생각이 불쑥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이제 시간은 겨울 방학이 되기까지 한 달과 2월에 있을 보름을 더해 한 달 보름 정도가 남았다. 짧지만 계획했던 것을 무심하게 날려버린 잘못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 기간에 딱 한 곡만이라도 제대로 불러보자는 생각을 하고 오늘 숨겨둔 X파일을 열었다.
  첫 곡은 10여 년 전에 잠깐 유행했던 <우리 이야기>로 골랐다. 가사가 아이들 생각과 꼭 맞아떨어지는 노래다. 글 첫머리에 써놓은 가사가 1절이고 2절과 3절이 이어진다. 1절은 선생님, 2절은 부모님, 3절은 어른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
  쉬는 시간에 이 노래를 담은 플래시 파일을 켜 놓았더니 몇몇 아이들이 눈길을 보냈다. 나는 노래를 일명 ‘능청 작전’을 펴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 노래 가사가 왜 이렇노? 이거 어른들 모독하는 노래 아냐?”
  아이들은 내 말에 귀가 솔깃한 듯 TV 앞으로 다가왔다.
  “가사 좋은데요?”
  “딱 맞는 말만 하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노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할 얘기가 많은 걸요’
  “맞다!”
  ‘떠든다고 지우개처럼 이제 그만 탁탁 터세요 야야야야’
  “옳소!”
  TV에서 가사가 한 구절씩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추임새를 넣었다. 이제 모든 아이들의 눈길이 TV로 쏠렸다.

 

  엄마 우리 아버지 이제 그만 야단치세요 네?
  형들처럼 언니들처럼 철이 들지 않았잖아요
  많은 숙제 하다보면 늘 시간이 없는걸요
  훌륭한 사람 되려며는 공부만 해야하나요 말도안돼
  우리들은 개구쟁이지만 튼튼하게 자라잖아요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안되는 게 너무 많아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며는 어린 시절 까먹나봐
  우린 알아요 어른들 말씀 잘 되라고 하시는 말씀
  하지만 조금만 더 우리 마음 알아주시면 랄라라라
  정직하고 남 도울 줄 아는 좋은 사람 될 터인데

 

  2절, 3절에서도 아이들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거의 모든 아이들의 입에서 한 목소리로 추임새가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상도 찌푸리고 고개도 부지런히 돌렸다. 검지로는 TV를 가리키며 노래가 틀려먹었다는 몸짓을 했다.
  노래는 두 번 더 부른 뒤에야 끝났다. 곡을 고를 때는 10여 년 전 노래여서 요즘 아이들에게도 통할까 걱정했는데 반응은 대폭발 수준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겪는 현실과 하고 싶은 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노래가 끝난 뒤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 노래 안 되겠어. 가사가 어른들한테 너무 심해. 이 노래 금지곡으로 정해야겠어.”
  아이들은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선생님 미워할 거예요.”
  “선생님 저주!”
  몇몇 아이들은 벌써 엄지손가락을 바닥으로 돌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