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아침부터 교실은 후끈거렸다. 요 며칠 장마비가 주춤한 탓이다. 출근길 차 안에서 에어컨 덕으로 시원한 아침을 맞는가 싶더니 교실이 있는 4층으로 등산(?)하면서 다시 전쟁은 시작됐다. 더위와의 전쟁이...
뉴스를 보니 어제 이 곳 김해의 기온은 32도, 불쾌지수는 무려 80%나 됐다. 오늘도 마찬가지일거라고 한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교실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혀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네 대의 선풍기는 바람 소리를 내며 신나게 돌아가고 있고, 여학생들은 요즘 유행하는 ‘똥부채’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학생 몇몇은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했는지 낯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땀에 흠뻑 젖은 몸을 말리느라 선풍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더위가 묻어나왔다.
이런 탓이었을까? 일주일에 단 한 번 있는 아침자습인 신문스크랩을 한 아이가 남학생은 고작 3명, 여학생도 절반을 겨우 넘겼다. 더군다나 어제 내 준 사회 숙제를 한 아이는 46명 가운데 8명! 말문이 콱 막혔다.
평소때였다면 야단이라도 쳤겠지만 너무나 어이없는 결과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더운 날씨에 아이들한테 목소리 높이는 건 전혀 교육적인 배려가 아닐테고, 그냥 무더위 탓으로 돌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아이들도 그걸 원하는 것 같고.
정말 학교라는 곳은 더위에 무한정 노출되어 있다. 지금처럼 바깥 온도가 30도를 웃돌면 교실 온도는 35도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작년 이맘때는 온도계를 늘 달아놓았는데 날마다 36도를 맴돌았다. 그런데도 냉방은 아예 기대를 못한다.
반 아이들 숫자라도 좀 줄여주면 숨통이라도 트겠지만 모든게 예산과 직결되는 문제라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학교는 복 많이 받은 학교라고 한다. 아직 교실에 선풍기도 한 대 없는 교실이 수두룩하다는데 우리는 교실마다 4대씩이나(!) 있다나.
아이들의 집중력은 무더위 속에서 불 만난 엿가락처럼 고개를 떨군다. 학습 준비도 안되고 막상 수업을 진행하려 해도 산만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게다가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옆 반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와 식당 환풍구 돌아가는 소리 등 각종 소음 때문에 더더욱 산만하다. 천장에 매달린 4대의 선풍기도 열기를 식히기 보다는 돌아가는 소리만 크게 내어 소음의 주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집중력이 떨어지기는 교사도 마찬가지다. 옆반 선생님은 수업을 하는데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까먹기도 하고, 말이 헛나올 때도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렇게 더울 때는 수업할 맛이 뚝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공부시간이 되어도 마음이 안절부절하게 된다. 아이들한테 괜한 짜증을 낼 때도 있다. 어떻게 하든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을 탈출하여 화장실로 달려가 손에 물이라도 적시는 것이 유일한 위안인 셈이다.
땀이 많이 날 때는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부러움이 가득찬 여선생님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여선생님들은 얼굴을 씻게 되면 화장을 다시 해야 되니 세수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유달리 더위에 약한 나로서는 올여름 무더위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름 전쯤에 교실에 두고 쓸 선풍기를 한 대 샀다. 학교에서는 전기료 많이 든다고 전열기를 넣지 말라고 하지만 '살인적인' 무더위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학교 방침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선풍기 덕에 그나마 오후에 교실에 앉아서 뒷정리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학교에서 냉방이 되는 곳은 단 3곳. 교무실과 서무실 그리고 교장실이다. 각각의 방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이런 방들이 가까이 있으면 일보러 가는 척하며 한 번씩 들르기라도 하겠지만 교실이 4층이라 내려갔다 바람 좀 쏘이고 올라오면 다시 땀 범벅이 되기 때문에 잘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을 찜통 속에 넣어두고 나만 시원함을 즐기는 것도 올바른 심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그저 빨리 퇴근해서 시원하게 샤워한뒤 선풍기 앞에 앉아 냉장고에서 갓 꺼낸 수박을 한 조각 물고 마누라와 새콤달콤한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든다. 물론, 그 전에 무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줄 무서운 귀신이야기를 몇 편 준비해뒀다가 아이들에게 들려줄 계획 정도는 세워둬야겠지. 아니면 등골이 오싹한 공포 비디오 목록이라도 뽑아놓든지.
참 별 생각이 다 드는 오후다. (199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