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9월 16일 - 눈으로 보는 공부

늙은어린왕자 2014. 9. 23. 18:16

[별에서 온 선생님] 눈으로 보는 공부

-안드로메다 비밀 아지트-


1. 볼거리를 찾아서

"얘들아, 오늘은 본 것을 써보자."
"본 게 없어요."
"눈 뜨고 생활하면 뭐든지 보는데 왜 본 게 없다고 해?"
"본 게 생각이 안 나요."

아침활동 시간에 본 것을 쓰자고 하자 꼬물이들이 볼멘 소리를 늘어놓았다. 본 것도 없고 떠오르는 것도 없다고 한다. 이대로 썼다가는 지옥글쓰기가 될 게 뻔하다.

"좋다. 오늘은 바깥에서 움직이는 동물을 관찰하고 써 보자."

꼬물이들은 환호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지 않고 몸을 놀릴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으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물이들은 의자에 붙은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몇몇 성급하게 달려나간 녀석들을 불러서 연필과 종이를 챙기도록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꼬물이들이 더 이상 꼬물이가 아니었다. 어느 새 놀이터로, 중흥 2차 아파트 울타리 아래로 흩어지고 없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관찰하러 사진기를 들고 엉거주춤 뒤따랐다.

어떤 글감을 물고 올까? 일한 지 한 학기가 지났지만 언제 보아도 우리학교는 참 삭막하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땅은 없고 온 사방이 딱딱한 시멘트로 둘러싸였다. 운동장도 너무 좁고 코딱지만한 화단은 화분처럼 장식용에 불과하다. 사람이 놀 만한 공간도 없는데 곤충 같은 동물이 살 곳이 있을 리 없다.

"선생님, 관찰할 게 없어요. 나무 관찰하면 안 돼요?"

놀이터 옆에 서 있으니 여자 아이들 몇몇이 하소연 하러 왔다.

"나무 보다는 움직이는 게 좋겠는데...어디 보자."

마침 울타리 위로 잠자리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잠자리 관찰도 괜찮겠고, 아니면 저기 울타리 사이에 있는 거미는 어때?"

중흥아파트단지로 나가는 울타리 아래에 거미 두 마리가 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럿이 관찰하기에는 자리가 너무 좁았다. 울타리 위에는 엄지손톱만한 연하늘색 나비 두 마리가 날고 있었지만 움직임이 빨라 관찰하기는 어려워보였다. 중흥 2차쪽 울타리 아래에는 남자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볼거리가 없다는 뜻이다. 선을 넘어야 했다. 거미나 개미를 보는 몇몇 아이들을 두고 우리는 중흥1차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2. 안드로메다 비밀 아지트

103동과 105동 앞에는 제법 큰 정원이 있는데 1학기 때는 공사하는 날이 많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오늘 보니 놀이터와 오솔길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02동 앞 테니스장에서부터 105동 앞까지 꼬불꼬불 난 길을 따라 꼬물이들과 걸었다. 점박이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잠자리와 여치, 메뚜기가 뛰었다. 고작 담 하나를 넘어왔을 뿐인데 메마른 달 표면같은 학교와는 딴판이다.

운동장 가에서 놀고 있던 '언제나 꾸러기'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왔다. 녀석들은 오솔길을 벗어나지 말라고 해도 메뚜기 잡는다며 풀밭을 뛰어다녔다. 저런 야생동물(?)들을 네 벽이 꽉꽉 막힌 우리(교실)에 가둬놓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랴? 녀석들은 망아지, 아니 송아지처럼 뒷발을 공중으로 걷어차며 뛰어다녔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새 첫째 시간 마칠 무렵이었다. 이제 들어가서 지금껏 본 것, 겪었던 것을 글로 옮기면 될 듯 싶었다. 하지만 꼬물이들은 아직 배가 고팠다.

"좀 더 있다가 들어가요!"

꼬물이들이 애절한 목소리로, 소망하는 눈빛으로 합창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있기로 하고 우리는 103동, 105동, 107동이 만나는 곳에 있는 둥근 나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 될 줄이야.

"꺄악! 여기 이상한 벌레 있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여기도 있다!"

사실이었다. '섬잣나무' 팻말이 붙은 나무 아래 풀잎사귀에 등에 가시가 총총 난 애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길이는 3~5cm 정도 되었고, 시커먼 몸에 주황색 줄이 있었다. 색깔로 봐서는 우리 별에 사는 초코곤충을 닮았다.

꼬물이들은 애벌레를 나무의자 위에 올려서 관찰했다. 움직이는 모습은 여느 애벌레와 다르지 않았으나 등에 뾰족뾰족하게 올라온 가시가 징그러워보였다. (알아보니 이 애벌레들은 '암끝검은표범나비'였다. 처음 봤던 점박이 나비가 바로 이 나비다.)

꼬물이들은 아랑곳 않고 애벌레를 데리고 놀았다. 나무토막을 건너갈 때는 틈새에 나뭇가지를 넣어 다리도 놓아주고 풀색깔 똥 누는 모습도 봤다. 시커먼 몸에 초록색 똥이 나오는 모습은 내가 봐도 아주 신기했다.

"저기 번데기 있다!"

꼬물이들이 애벌레에 빠져있을 무렵, 호기심 가득한 '언제나 꾸러기'님들이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105동 벽에 붙은 번데기를 찾은 것이다. 꼬물이들은 벽으로 우루루 몰려갔다.

번데기는 모두 세 개였다. 두 개는 텅 비었고 하나는 번데기가 들어있었다. (전문가한테 물어보니 이 번데기는 '암끝검은표범나비' 번데기라고 한다.) 꼬물이들은 차례차례 번데기를 살폈다.

"번데기 몸이 빛나요."
"금빛이에요."

신기하게도 텅 빈 껍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번데기가 든 것은 몸통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것은 천적을 방어하려고 형광물질로 빛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꼬물이들은 진지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얘들아, 이 곳을 안드로메다 비밀아지트로 정해야겠어."

안드로메다 우리 별은 곤충 천국이다. 사람은 곤충들이 사는 곳을 파괴하지 않는다. 설탕곤충, 초코곤충, 오렌지곤충 같은 곤충을 먹기는 해도 딱 먹을 만큼만 먹지 누구도 많이 가지려고 잡아서 쌓아두거나 팔지 않는다. 그러니 배고파서 먹는다고 줄어드는 일은 없다. 여기도 암끝검은표범나비 애벌레나 번데기가 마음놓고 살아가니까 마치 우리 별에 온 느낌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빈이가 귓속말을 전했다.

"선생님, 저 나무 밑에 죽은 새 무덤이 있어요."

5월이었던가? 다빈이가 키우던 새가 죽어서 슬퍼했던 일이 있었다. 그 새 무덤이 여기에 있다니 놀라웠다.

"그러니? 이제 걱정마라. 여기를 안드로메다 비밀아지트로 정했으니까 새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가서 더 멋진 새가 되었을 거야. 우리 별에는 지구보다 훨씬 크고 멋진 새가 많거든."

다빈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 교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가지고 놀던 애벌레를 모두 제 자리에 놓아두도록 했다. 그런데 민채가 애벌레를 놓아두려고 나무 밑으로 가다가 다른 애벌레 한 마리를 밟아버렸다. 애벌레 몸에서는 초록색 피가 났다. 민채는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다.

"민채야, 저 애벌레도 안드로메다에서 멋진 초코곤충으로 다시 태어날거야."

민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3. 야! 직박구리

대부분 아지트를 빠져나가고 몇몇이 정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푸드득 푸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시커먼 새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벽에 매달려 있던 번데기를 물고 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
"야~아! 새가 번데기 물고 갔다!"

고함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다시 아지트로 몰려들었다. 꼬물이들은 텅 빈 벽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없네?"
"이럴수가!"
"누가 그랬어!"

화가 잔뜩 난 꼬물이들이 나무 위를 올려다 봤다. 107동 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새 몇 마리가 팔랑팔랑 날고 있었다. 연둣빛 깃털을 가진 동박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놈은 아니야."
"그럼 저 쪽으로 가보자."

우리는 107동 앞으로 갔다. 나무 위에는 비둘기보다 조금 작은 새 세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나뭇잎 뒤에도 한 마리 보였다. 모두 어두운 잿빛 몸통에 긴 꼬리날개가 있었다. 녀석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꼬리날개를 아래 위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저 녀석이다!"
"개똥지빠귀인가?" (검색해보니 번데기를 물고 간 새는 '직박구리'였다.)

꼬물이들이 손가락질 하며 한 마디씩 했다.

"야! 이 나쁜 새야."
"누구 맘대로 번데기를 물어가!"
"번데기 내놔!"

'꾸러기'들은 비비탄 총을 가져와야 된다는 둥 잡을 계획까지 세웠다. 재웅이는 특히 화가 많이 났다.

"새를 잡아서 죽일 거에요."
"안 돼! 아무리 싫더라도 새를 죽이면 안 돼. 새도 지구 식구야."

씩씩거리는 재웅이를 진정시키고 나는 생각했다. 지구에도 우리 별 처럼 좋은 곳이 있구나! 그것도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말이다. 아름다운 나비가 될 번데기와 애벌래를 한 마리씩 잃기는 했지만 안드로메다 비밀아지트를 찾은 것만 해도 오늘 바깥활동은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꼬물이들이 쓸 게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