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9월 23일 - 경호의 성공스토리

늙은어린왕자 2014. 11. 21. 16:15

<교실풍경>
경호의 성공스토리


어제 직업놀이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본떠 직업을 정하고 가게나 사무실을 차려 실제처럼 일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경찰과 소방대원이었고, 가장 실속있었던 직업은 의사, 약사, 제빵사였지요. 미용사와 문구점 사장님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경호는 인기도 없고 실속도 없는 농장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경호 말로는 농장에서 달걀과 우유를 생산해서 판다고 하더군요. 실물은 없었지만 닭과 젖소 그림이 들어간 간판을 멋지게 만들어 붙였습니다.

놀이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사탕이나 젤리약을 주는 약국, 식빵을 주는 빵집으로 몰렸습니다. 병원, 미용실도 붐볐습니다. 당연히 실물이 없는 농장에는 아이들 발길이 닿지 않았지요.

"선생님, 우리 농장에는 한 사람도 안 와요."

경호는 특유의 찡그린 얼굴로 하소연했습니다. 좀 더 기다려보자고 달래서 보냈지만 5분도 안 되어 또 찾아와서 울상을 지었습니다. 급기야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손님이 없기는 서어지공원에서 일 년에 딱 한 번 노래한다는 이벤트 가수 성웅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성웅이는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경호는 이런 상황을 견딜 만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해볼까? ... 그래! 저게 좋겠다."

방법을 고민하던 중 칠판 아래에 있던 우유상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얼른 우유상자를 농장가게로 들고왔습니다. 상자 안에는 아침에 가져온 우유가 그대로 들어있었습니다. 놀이 준비하느라 먹을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아이들 마음이 사탕, 젤리, 음료에 가 있으니 우유를 먹었을리가 없지요.

"경호야. 우유를 팔자. 어차피 우유가 농장에서 왔으니까!"

경호는 기쁜 얼굴로 좋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기보다는 뭔가를 할 수 있어서 좋다는 뜻이었겠지요.

"한 개에 얼마받을까? 천 원 어때?"
"너무 많아요. 오백 원 해요."

아무리 견본 종이돈이었지만 우유 한 개에 천 원 받았으면 욕 먹을 일이었습니다. 경호 판단대로 오백 원 받기로 하고 우유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우유는 날개돋힌듯 팔렸습니다. 그냥 먹으라고 했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텐데 너도나도 사먹는다고 하니 우르르 몰려와서 우유를 사갔습니다. '김해시진영읍경찰서' 경찰관 서진이는 두 개나 사주었습니다. 경호는 싱글벙글 입이 바가지만하게 벌어졌습니다.

한참 뒤 우유 판매가 끝나고 경호가 달려왔습니다.

"선생님, 저 돈 많이 벌었어요. 보세요!"

정말 경호 가게 책상 위에는 종이 돈이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우유상자 안에는 우유가 몇 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경호는 가난한 농사꾼(?)에서 성공한 농장주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찡그렸던 표정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호가 실패 대신 자신감을 수확한 것같아 나도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9월 23일)